제5장
임성준은 비서로부터 온유나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당시 그는 드림국에 있었다.
제원 그룹에 중요한 계약 건이 하나 있어 반드시 그가 현장에 있어야만 했다. 계약을 체결하자마자 비서가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고 전했고 이에 임성준은 가장 빠른 비행기로 돌아왔다.
공항에 도착해 온유나가 성씨 저택에 있다고 하니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갈 뿐 이 사이에 발생한 일에 대해 전혀 알아볼 겨를이 없었다.
성우진을 향한 온유나의 사랑은 이젠 거의 모르는 이가 없다.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감정인 걸 뻔히 알면서도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고 꿋꿋이 버텨왔다.
그러다 보니 3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만약 이혼이 쉽게 이뤄진다면 그녀가 버텨왔던 이 시간이야말로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성우진과의 이혼을 언급하니 온유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아직도 뇌리를 스쳤다.
온유나는 임성준이 건넨 따뜻한 물 한 잔 손에 들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임성준도 다그치지 않고 침착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 그녀는 꼭 대답해줄 테니까.
“오빠...”
온유나가 입술을 앙다물고 그에게 컵을 건넸다. 성우진과의 서로 괴로웠던 이 결혼 생활은 한두 마디로 그에게 어떻다 할 설명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숨을 깊게 몰아쉬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나도 할 만큼 했고 이젠 지쳤나 봐요.”
자존심을 내려놓고 4년 동안 성우진을 사랑해왔는데 정작 그에겐 끈질기게 빌붙어 사는 악덕 와이프라는 낙인으로 찍혔으니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을 듯싶다.
자신의 곁을 떠난 이 아이를 생각하노라면 온유나는 저도 몰래 눈시울이 붉어진다.
3년 동안 힘들게 버텨온 결혼 생활인데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손으로 배를 가볍게 어루만지는 그녀였다.
아이가 생긴 줄도 몰랐는데 이대로 없어지다니...
임성준은 슬픔에 젖은 그녀를 차마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다.
결국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옆에서 지켜줬다.
“유나야, 나랑 함께 강성 가서 살아.”
한참 생각한 끝에 임성준이 입을 열었다.
이어서 편지를 하나 꺼내더니 그녀에게 전했다.
“아저씨가 네게 남겨주신 거야.”
온유나는 멍하니 편지를 건네받으며 그의 말을 들었다.
“아저씨는 네가 갈 데까지 가는 성격인 걸 잘 아셔. 너를 아끼니까 네가 원하는 걸 추구하길 바라셨던 거야. 이 몇 년 동안 아저씨는 줄곧 너를 지켜봐 오셨어.”
온유나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유나에게...]
시작부터 가슴 뭉클해지는 말투였다.
[우리 유나 고생했어. 요 몇 년간 네가 얼마나 힘든지 아빠가 다 알아. 넌 줄곧 비참하게 망한 결혼 생활을 수습하려고 꿋꿋이 버텨왔잖아. 우리 유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준 그 남자, 한때 유나에게 맹세했던 그 남자... 아직 널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맹세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유나는 약속 지켰어. 수년간 그를 사랑해왔으니 그거면 충분해. 우리 유나 너무 대견한 거야!]
[네 사랑이 너무 위대해서 성우진은 그걸 품을 자격 없어.]
[네 엄마가 의식이 깨어있을 때 항상 내게 잔소리했거든. 너희가 나중에 고생할까 봐 나더러 유희랑 너한테 꼭 뒷길을 마련해주라고 당부했어.]
[너희 엄마는 네가 성우진을 바라볼 때만이 두 눈에 빛이 감돈다고 하셨어. 우진이가 너의 빛이 되어준다면 그 빛을 좇아가게 하라고 했지.]
[나중에 우리 모두 알게 됐어. 성우진은 네가 생각하는 행복의 종착역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부모로서 당연히 널 응원해야 하는 거 아니겠니. 이 또한 부모로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잖아.]
[유나야, 네 사랑으로 그 결혼 생활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아빠는 가늠할 수 없구나. 이 몸 상태가 버텨주지를 못하는 것 같아. 그래서 마지막으로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너를 위해 뒷길을 마련해주는 거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땐 이미 철저하게 실망하고 단념했을 때겠지. 물론 성준이도 만났을 테고. 아빠는 네가 경운시에 남아있길 바라지 않아. 강성에 부동산을 장만해놨고 너랑 유희가 평생 누릴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해놨어.]
[네 삼촌이 좋다면 회사는 가져가라고 해. 아빠는 네가 너무 많은 걸 짊어지는 게 싫어. 몸 밖의 재물은 중요치 않으니 그냥 내버려 둬.]
[아빠, 엄마는 우리 유나, 유희가 언제든 용감하게 이 세상을 마주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엄마, 아빠가 옆에 있어 주지 못해도 늘 너희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할 거야.]
[우리 유나, 유희는 엄마, 아빠가 이 세상에 남긴 가장 빛나는 별이야. 눈부시게 빛나지 않아도 되니까 남은 생을 즐겁고 안정적으로 살길 바라.]
[마지막으로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해둬. 엄마, 아빠는 영원히 너희를 사랑한단다.]
[아빠의 마지막 편지.]
편지를 읽은 온유나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나간 일을 되새겨보니 자신이 얼마나 제멋대로였던지 후회가 밀려왔다.
젊고 어린 나이라 수많은 선택지가 놓여있는데 두 눈엔 오직 성우진으로 가득 차서 다른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오는 걸 아예 거부했다.
나중에는 성우진 아니면 안 된다고 억척스럽게 굴기도 했다.
부모님은 처음에 갖은 방법으로 말리다가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녀가 걸어온 걸음마다 부모님이 단단하게 펴놓으신 길이었다.
15년 전 그날 밤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온유나는 절대 성우진을 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때 성우진에게 손 내밀어 구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인생도 이런 비극을 맞이하진 않았을 텐데.
그의 한 마디 맹세로 줄곧 그만 바라보더니 결국 이런 결말을 초래하게 됐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때 임성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생전에 강성에 한 번 다녀오셨어. 너랑 유희를 위해 집을 장만하신 것도 있고 내게 일부 사항을 교대한 것도 있고 또 그때 이 편지를 주신 거야. 인제 드디어 편지를 네게 전해줬네.”
그는 온유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유나 너도 이젠 어른이잖아. 평생 이렇게 지낼 순 없어. 아저씨는 너랑 유희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 아저씨 말대로 널 위해서 살아봐봐. 내가 늘 옆에서 지켜줄게. 네가 이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말이야.”
그의 도움 없이 홀로 이 세상에 맞설 때까지 지켜줄 수 있는 임성준이었다.
온유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빠의 글씨체를 빤히 쳐다봤다.
어쩌면 성우진과의 가장 원만한 결말은 그녀가 멀리 떠나가고 둘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그런 결말일 듯싶다.
잠시 후 온유나가 생각을 마쳤다.
“알았어요. 오빠랑 함께 강성 가서 살래요. 이제 더는 이곳에 돌아올 일 없어요.”
두 눈을 질끈 감으니 형형색색의 사람들과 지나간 모든 일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젠 경운시와 작별할 때가 된 듯싶다.
이런 결말이라면 그리 험한 몰골은 아니겠지.
오늘 임성준이 온 거랑 별개로 온유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몸이 다 회복되거든 이곳을 떠나겠다고 말이다.
피론체에 가서 온유희를 찾든 조용한 곳에 가서 소소한 일상을 보내든 이곳은 무조건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경운시를 떠나기 전, 그녀는 15년이나 사랑한 그 남자를 마지막으로 보러 가고 싶었다. 이 스토리의 결말을 맺는 셈 치고, 그 감정에 대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이번 생은 해피엔딩을 이룰 수 없던 그 사랑에 종지부를 찍으러 가고 싶었다.
온유나는 병원에서 보름 동안 지낸 후에야 퇴원했다.
그 시각 경운시에 한창 큰 눈이 내렸고 도시 양옆의 그린벨트는 두꺼운 눈송이로 소복이 뒤덮였다.
서빈 거리에 간간이 진 물때는 눈 녹은 흔적이었다.
온유나는 머플러를 두른 채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가녀린 몸은 실로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이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삼촌 온태식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