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주하준과 만난 지도 3년이 되었건만 그는 여전히 나에게 청혼할 생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내 의붓 여동생에게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울지도 않았고 또 예전처럼 그가 실컷 놀다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대신 그가 준 선물을 모두 버리고 몰래 사두었던 웨딩드레스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의 생일날, 나는 홀로 하성을 떠났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주하준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왜 아직도 안 와? 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
그는 보름 전, 내가 대학 선배인 고유안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비행기가 새로운 도시에 착륙하면 우리는 곧바로 혼인신고를 하러 갈 예정이다.
...
“선배, 나 이미 결정했어.”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창백하고 수척해진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다.
“여정아... 내 청혼 받아줄 거야?”
전화기 저편에서 고유안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는 마음이 시큰거려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받아줄게.”
“여정아, 너 그거 알아? 난 대학 다닐 때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어.”
나도 모르게 거울 속의 내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보름만 기다려줘. 이쪽 일은 내가 전부 처리할게, 선배.”
“그래, 여정아. 기다리고 있을게.”
통화가 끝나는 순간 누군가 내 방문을 힘껏 밀고 들어왔다.
“여정아.”
아빠는 멋쩍은 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여정아, 네 동생이 몸이 안 좋아서 말인데 네가 며칠만 방 좀 바꿔주면 안 될까? 네 방에는 햇빛이 잘 들어오잖아.”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아빠 뒤에 서 있는 계모와 의붓여동생인 송민하를 바라보았다.
이때 계모가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여보, 여정이 불편하게 그러지 마세요.”
송민하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아빠. 저 괜찮아요. 저 때문에 괜히 언니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말이 어딨어? 너도 내 딸이야.”
말을 마친 아빠는 엄숙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정아, 언니인 네가 양보해.”
나는 멍하니 내 앞에 있는 아빠를 바라봤다.
혈연관계도 없는 의붓딸을 친딸보다 더 아끼는 아빠 때문에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지만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죠, 뭐.”
이제 보름이 남았다.
보름 뒤면 나는 영영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러니 어느 방을 쓰던 전혀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