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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그 순간 노은정은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로펌에 일이 생겼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아픈 유세정을 돌보러 달려갔을 것이다. 그날 밤 확신에 찬 어조로 절대 바람 안 맞힌다고 말하던 강윤빈을 떠올리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는 30분도 내주기 싫었던 거야?’ ‘강윤빈, 만약에 오늘이 너와 나의 마지막이란 걸 알게 된다면 넌 아까의 결정을 후회할까?’ 하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을 질문이고 그녀 역시 더 이상 답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엄 변호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변호사님, 오늘이 숙려기간 마지막 날인데 제가 뭐 더 보충할 거라도 있나요?] 엄 변호사에게서는 바로 답장이 왔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미 숙려기간 마지막 날까지 왔으니 절차는 마무리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걸 축하드려요.] 새로운 삶이라. 그랬다. 오늘부터는 더 이상 강윤빈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더는 그에게 관심을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노은정에게는 더 빛나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세 시간, 그녀는 집에 남은 물건들을 모두 내다버리고 홀로 소파에 누워지는 석양을 감상했다. 마지막 두 시간, 그녀는 노트북을 펼치고 오늘 찍은 사진들을 편집해서 동영상을 만들었다. 마지막 한 시간, 영상 편집이 완료되자 그녀는 한번 확인한 후에, 카메라 앞에 마주앉아 녹화버튼을 눌렀다. 강윤빈에게 남기는 마지막 영상 편지였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그녀는 카메라와 이혼협의서를 침실 침대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강윤빈, 이제 우린 끝났어.’ ‘축하해, 나도 이제 내 삶을 살 거야.’ 마지막 준비까지 끝낸 후,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3년을 살았던 집을 떠나 공항으로 향했다. 아무도 그녀가 어디에 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떠나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가벼웠으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편. 유세정의 컨디션이 안정된 후에야 강윤빈은 그녀의 집을 나왔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지난번에 못 지켰던 약속이 떠올라 노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열몇 통이나 걸었지만 고객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싸늘한 음성만 들려왔고,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결혼하고 3년 동안 한 번도 있은 적 없는 일이었다. 강윤빈은 지난번 교통사고가 떠올라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바로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새로 이사할 집의 가구들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강윤빈은 한눈에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집에는 노은정의 물건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가슴이 철렁해서 원래 살던 집으로 급급히 향했다. 집안은 텅 비어 있었고 방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침실에 들어간 그는 침대머리에 놓여 있는 카메라와 서류를 발견했다. 그는 며칠 전 카메라를 들고 활짝 웃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카메라를 켰다. 영상을 틀자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영상 속에는 S대 곳곳을 찍은 사진들과 짤막한 글들이 담겨 있었다. 그는 정지버튼을 잠깐씩 눌러가며 천천히 감상했다. “강윤빈, 운동장에 테니스하는 학생들이 여전히 많네. 맨 처음 당신한테 고백했을 때가 이곳이었는데. 그때 당신한테 거절당하고 숙소에 돌아와 엄청 울었어.” “강윤빈, 도서관 창가 자리는 여전히 인기석이야. 학생들 공부하는 거 방해할까 봐 멀리서 사진만 찍었어. 저 자리 기억나지? 당신이 가장 좋아하던 자리였잖아.” “강윤빈, 농구장 기억나? 사실 난 여기서 몰래 당신의 모습을 4년이나 훔쳐봤었어.”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강윤빈은 마치 6년 전 풋풋하던 학생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졸래졸래 그의 뒤를 쫓아다니던 노은정을 떠올리자, 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음악이 끝났지만, 영상은 1분이나 더 남아 있었다. 그는 뭔가 대단한 서프라이즈라도 있나 보다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기대했던 노은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강윤빈은 의아함 반, 궁금함 반을 품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잠깐 후, 노은정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어딘가 지쳐 보이는 안색에 강윤빈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강윤빈, 오늘이 우리가 알게 된지 10년이 되는 날이자, 내가 당신을 짝사랑한지 10년째 되는 날이야. 믿기 힘들지? 내가 당신을 사랑한 시간이 열 손가락 꽉 차다니. 사실 나도 잘 믿어지지 않아. 인간에게 10년이 몇 번이나 있을까?” “10년 동안 7년을 짝사랑했고 3년을 당신이랑 부부로 살았지만 결국 난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어. 내 무모한 사랑을 위해 난 참 많은 희생을 치렀지. 난 내가 노력하면 언젠간 당신이 날 봐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닌 건 아니었던 거야. 또 3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고 심지어 10년이 지나도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래서 이 기념비적인 날에 난 중요한 결정을 했어. 바로, 당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유세정 씨를 향한 당신의 마음을 존중하기로 한 거야. 당신이 이 영상을 보고 있을 때쯤이면 아마 모든 게 끝나 있겠지. 영상을 통해 내가 전할 말이 있어. 아니, 통보가 되겠지.” “강윤빈, 우린 이혼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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