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안녕하세요. 이혼상담 좀 받으러 왔는데요.”
결혼한지 3년만에 노은정은 이혼을 결심했다.
다만 그 과정은 남편 몰래 진행하기로 했다.
맞은편에 앉은 변호사는 그녀의 의도를 듣고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협의이혼이라면 부부 쌍방이 이혼협의서에 사인하여야 하고 한 달의 숙려기간이 주어집니다. 남편분 같이 안 오셨나요?”
노은정은 잠깐의 침묵 후에 이렇게 말했다.
“사인은 조만간 받아낼 거예요.”
“좋습니다. 그럼 일단 이혼협의서 먼저 작성해 드릴게요.”
잠시 후, 노은정은 이혼협의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안내데스크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노은정, 로펌엔 어쩐 일이지?”
고개를 들자 모든 걸 꿰뚫어볼 것 같은 강유빈의 예리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순간 노은정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혼 절차를 밟으러 왔는데 하필이면 남편이 일하는 로펌일 줄이야.
하지만 그에게 들킬까 봐 걱정할 우려는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노은정은 길게 심호흡하고 최대한 긴장을 풀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뭐 좀 알아보려고 왔어. 참, 아버님, 어머님이 저번에 우리 앞으로 돌려준다던 부동산, 계약서 가져오셨더라고. 당신 사인이 필요해.”
말을 마친 그녀는 이혼협의서의 마지막 공백 페이지를 펼치고 볼펜과 함께 그에게 건넸다.
서명란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페이지라 강윤빈은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엘리베이터 입구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잠깐 주저하더니 이내 볼펜을 들어 노은정이 가리킨 곳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했다.
“별일 없으면 이만 돌아가 봐. 난 아직 할 일이 남았어.”
바짝 긴장했던 노은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오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가 조금만 더 자세히 훑어봤어도 계약서가 부동산 계약서가 아닌 이혼협의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유세정이 나타나자마자 그의 시선은 온통 그녀에게 사로잡혀 버렸다.
요정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보자 노은정은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방끈을 힘주어 잡고 종종걸음으로 로펌을 나갔다.
자동문이 닫힌 후, 두 사람의 목소리가 지나가는 그녀의 귓가에까지 전해졌다.
“오빠, 저 여자분 누구야?”
“오늘 처음 온 의뢰인. 이혼 상담하러 왔대.”
노은정에게는 차갑기만 하던 강윤빈의 목소리가 유세정 앞에서는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조금만 기다려 줄래? 이따 같이 나가서 밥 먹자.”
애정이 가득 담긴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미 완성된 이혼협의서를 보고 있자니 노은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혼상담 하러 온 건 맞지.’
한 달만 지나면 강윤빈은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노은정과 강윤빈은 비공개 결혼이었다.
쌍방 부모님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들이 부부인 것을 몰랐다. 물론 거기에는 그의 첫사랑도 포함이었다.
비공개 결혼은 그의 결정이었다.
그들은 원래 대학동창이었다. 대학교에 금방 입학한 그 날, 노은정은 잘생기고 능력 좋은 강윤빈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후로 4년 동안 끈질기게 그의 뒤를 쫓아다녔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응답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노은정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만 거절한 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여자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생이 여자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졸업 후, 그녀는 바로 직장을 구했고 그는 학교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접점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녀는 한순간도 그를 잊은 적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다시는 겹치지 않을 것 같던 평행선이 3년 뒤의 한 맞선자리에서 다시 교차했다.
맞선자리에 나온 강윤빈은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자신과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비록 그가 왜 이렇게 결혼을 서두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옆에 서는 것이 오랜 숙원이었던 노은정에게는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역시도 부모님 재촉에 못 이겨 선자리에 나왔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리고 결혼 후에야 그녀는 그의 숨겨왔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될 사람을 품고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유세정, 바로 그의 절친의 여동생이었다.
강윤빈이 유세정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았기에 그녀는 줄곧 그를 친오빠처럼 대했고 애절했던 강윤빈의 짝사랑은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유세정은 졸업하고 바로 3년 연애하던 남자친구와 결혼했다.
그녀의 결혼은 강윤빈에게 크나큰 충격이었고 하루빨리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그리고 나날이 심해지는 부모님의 결혼 독촉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노은정은 한참 낙담했지만 결국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앞으로 함께할 날은 많고 자신이 노력한다면 그의 마음을 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3년이 지나도록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친근하다고조차 할 수 없었다.
노은정은 점점 자신을 잃어가며 방황하다가 어느날 사진첩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진첩에는 한 여자의 여섯 살때부터 스물다섯 살까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본디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남편이 오래도록 마음에 둔 여성이고 그들이 결혼한 후에도 사진첩의 내용은 계속 업데이트된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평소에 술이라곤 입에 대지도 않던 남편이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왔다. 그날 노은정은 평소에는 얼음장 같던 그의 눈동자에 가득 담긴 희열을 보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이 유세정이 이혼상담을 하러 찾아온 날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이 혼인관계를 끝내야겠다 마음먹었다.
이혼협의서를 받아내서인지, 3년이나 살았던 집에 돌아온 그녀의 마음은 어딘가 착잡했다.
그녀가 손수 만들어낸 아늑하고 포근한 보금자리에는 그동안의 그녀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정처없이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야는 결국 거실에 있는 그들의 웨딩사진에서 멈추었다.
사진 속에 억지미소를 짓고 있는 강윤빈을 보고 있자니 거슬리기 그지없었다. 노은정은 홧김에 손을 뻗어 사진을 내린 후에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후로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강윤빈은 거실에 있어야 할 웨딩사진이 보이지 않자, 책상 앞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아내에게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웨딩사진은?”
“나사가 느슨해져서 혹시 떨어질까 봐 내렸어.”
강윤빈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손에 있던 야식이 담긴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넨 뒤, 서재로 들어갔다.
자극적인 냄새를 맡자 노은정은 볼펜을 멈추었다.
쇼핑백을 열고 안에 든 매운 족발을 확인한 그녀는 순간 코로 신물이 올라왔다.
그녀는 만성 위염을 앓고 있었기에 자극적인 음식은 최대한 피해왔다.
하지만 정작 남편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의 환심을 사려고 꾹 참고 다 먹어치웠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쇼핑백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쓰레기통에 그대로 버려버렸다.
오늘부터 이 불공정한 혼인관계에서 느꼈던 서러움, 속상한 마음 모두 저 쓰레기처럼 버릴 것이다.
물론 거기엔 남편도 포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