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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1983년.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진 밤, 박씨 저택 거실에만 미세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저 엄마, 아빠랑 함께 해외 나가서 살래요.” 딸아이의 말을 들은 정태영, 한수진 부부는 머나먼 이국 타향에서 감격에 겨운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래, 이서야. 그해 지진만 아니었어도 우리 가족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떨어져서 지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엄마, 아빠가 널 일부러 버린 게 아니란다. 언제 올래? 우리가 꼭 마중 나갈게.” 부모님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박이서도 가슴이 찡해서 숨을 고르면서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보름만 더 기다려주세요. 여기 일들 마무리되는 대로 얼른 날아갈게요. 앞으론 엄마, 아빠랑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죠.” 정태영 부부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딸에게 당부했다. “그래, 맞아. 우리가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까. 박씨 가문에서 널 수년간 키워왔고 또 너희 도준 오빠는 거의 친동생처럼 널 예뻐했잖아. 그분들과 작별인사도 잘하고 와야지.” 박도준 이름 석 자에 그녀는 가슴이 움찔거리고 괴로움이 휘몰아쳤다. 박이서가 6살 되던 해, 큰 지진이 일어났고 그녀는 엄마, 아빠와 생이별한 뒤 박씨 가문으로 입양됐다. 박씨 가문은 뿌리 깊은 재벌 가문이다. 박정훈, 안해원 부부는 공사다망하다 보니 박이서를 입양했지만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쏟지는 못했다. 박씨 가문에서 그녀를 키웠다기보다 오빠 박도준이 정성껏 키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살 박이서가 천둥소리에 벌벌 떨 때, 박도준이 그녀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재워주었다. 10살 박이서가 친구들의 간식과 장난감을 부러워할 때, 박도준은 학교 앞의 작은 마트를 싹쓸이해서 그녀를 모두가 부러워하는 공주님으로 만들어주었다. 14살 박이서가 처음 생리할 때도 박도준이 분주히 돌아치면서 생리 지식을 가르쳐주었고 또한 따뜻한 대추차를 풀어주고 배도 살살 어루만져주었다. 사소한 머리핀, 신발, 옷들도 그가 선물한 것이고 값비싼 축음기, 자동차까지 박이서만 원한다면 그는 항상 가장 먼저 선물해주곤 했었다. 지인들은 그런 박도준에게 늘 농담 삼아 했던 말이 있다. 여동생을 이렇게 아끼는데 나중에 어떤 남자한테 시집보낼지 무척 궁금하다는 말. 그때마다 박도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박이서를 품에 꼭 안았다. “내 동생이랑 결혼할 남자는 우선 나보다 얘한테 더 잘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한편 그의 품에 쏙 안긴 박이서는 얼굴이 가려져서 빨갛게 물든 두 볼을 들키지 않았다. 아무도 모를 테지만 박이서는 어느덧 이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박씨 가문에서 보낸 수많은 날들, 박이서는 진작 박도준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고백할 엄두가 안 났고 또한 이 감정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몰래 일기로만 그에 대한 진솔한 마음을 써 내려갈 뿐이었다. 또한 절친 강윤아에게 절대 비밀로 해달라면서 이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강윤아가 글쎄 이 일을 박도준에게 일러바친 것이다. 그날 밤, 박도준은 갑자기 그녀의 방에 쳐들어와 어두운 표정으로 그 일기책을 찾아내더니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어서 너덜너덜해진 일기책을 그녀에게 내던졌다. 날카로운 종잇조각에 얼굴이 긁힌 박이서는 너무 아파서 고개를 홱 돌렸다. “난 네 오빠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기본적인 윤리, 도덕도 없어? 끝까지 파렴치하게 굴 거냐고?” 그날 박이서는 이 남자가 이토록 크게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매정한 그의 말이 박이서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녀는 멍하니 박도준을 쳐다보다가 맑은 두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였고 끝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미처 입을 열지도 못했는데 박도준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뒤로 박도준은 갖은 수를 써서라도 그녀와의 만남을 피했고 설사 가끔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낯선 이를 대하듯 한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곤 했었다. 심지어 일주일 뒤에는 아예 모든 사람이 다 있는 자리에서 그녀의 절친 강윤아와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두 사람이 언제 함께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박이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브닝 파티가 끝난 후 박도준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으려고 찾아갔지만 늘 차갑고 냉정하던 이 남자가 구석진 곳에서 강윤아와 뜨거운 키스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날 밤, 박이서는 눈물이 메마를 때까지 밤새 울었다. 어떤 일들은 아마도 해답을 찾을 수가 없고 또 어쩌면 해답을 찾을 필요도 없을 듯싶었다. 바로 그때 경찰한테서 연락이 오더니 그녀의 친부모님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잃은 뒤 오랫동안 힘든 나날을 보내셨다고 한다. 외교관으로 해외에 파견되었어도 딸아이를 찾는 걸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고 마침내 소식을 얻게 되어 엄청 감격스러워하신다고 전했다. 그 순간 박이서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란 게 원래 다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거구나.’ ‘박도준과 함께할 수 없는 것도 주어진 운명이고, 박씨 가문에서 지낸 수년이란 시간도 그저 다 허황한 꿈에 불과하지.’ 이제 그녀는 원래 자리로, 그녀만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한 박도준을 향한 애절한 이 마음도 내려놓을 때가 됐다. 다음날 박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얼른 아침을 먹으라고 반갑게 맞아주는 양부모님을 바라보며 그녀는 가볍게 웃으면서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어서 친부모님한테서 연락이 왔다는 사실도 전했고 이제 해외에 계시는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양부모님께 조심스럽게 알렸다. 박도준 엄마 안해원은 이 소식을 듣더니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대신 기뻐해 주었지만 막상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만 한가득 남았다. “엄청 잘됐네, 이서야. 엄마는 네가 드디어 친부모님을 찾아서 너무 기뻐. 아참, 이 일 도준이한테는 알렸니?” 박이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게도 알려야 할까? 현재 박도준의 마음속엔 강윤아뿐이라 알리든 말든 딱히 큰 의미가 없을 텐데... “뭘 알려요?” 이때 맑은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박이서가 고개를 홱 돌리자 마침 박도준이 훤칠한 모습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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