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나 결혼한 거야!”
꿈에서 깨어난 임지연은 머릿속에 이 말들만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숙취로 흩어진 머리를 감싸 쥐고 당장이라도 자신의 얼굴에 뺨을 후려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제 1년이나 사귄 남자 친구한테 파혼을 당한 것도 모자라 일주일 뒤에 전남친이 자신의 이복 여동생하고 결혼한다는 선언을 했으니...
그 일로 기분이 꿀꿀했었던 그녀는 술집으로 찾아갔었던 거고 뜻밖에도 술 취한 뒤로 한 남자와 결혼을 마친 것이었다.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려 보면 아마도 술집에서 아무나 잡히는 대로 잡아 왔었던 ‘젊은 남자’였었던 것 같았는데...
술집에 그토록이나 외모가 준수한 남자가 나타났으니 어쩌면 모델일 수도 있겠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녀는 눈동자가 점점 휘둥그레졌다.
외간 남자와 갑작스레 결혼을 했다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모델이랑...
어리둥절함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휴대폰이 옆에서 울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번호를 확인해 보니 계모인 정순자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녀가 휴대폰을 받자마자 상대가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임지연! 너 어제 어디에 있었어!”
임지연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정순자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이제는 다 큰 성인이라 어릴 때처럼 정순자가 때리고 꾸짖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친구 집에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
임지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답했다.
정순자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을 건넸다.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너한테 할 말이 있대. 급한 일이야.”
말을 마치고 난 정순자는 임지연한테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임지연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정순자가 이 사건을 빌미로 그녀를 괴롭힐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키가 훤칠한 한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고 그 남자는 수려한 외모에 심연처럼 깊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어젯밤의 기억 속에서 자신하고 결혼했던 남자인 육진우다.
그녀는 입을 뻥끗거리며 무언가를 해명하려고 했으나 방금 정순자가 경고했었던 말들이 떠올라 어쩔 수 없이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건넸다.
“어젯밤 일들에 대해서는 제가 나중에 해명하도록 할게요. 그리고 지금은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돌아가 봐야 해요.”
그런데 의외이게도 그 남자는 너무 개의치 않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데려다줄게요.”
잠시 고민을 하던 임지연은 거절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대낮에 택시를 잡기도 힘들거니와 꾸물꾸물하며 시간을 끌다 집에 도착하게 되면 정순자가 또 뭐라 트집을 잡을 게 뻔하니 말이다.
육진우는 직접 운전을 하여 임지연을 집에다 데려다주었다.
임지연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임시월과 마주치게 되었고 임시월은 눈가에 의미심장한 기운이 곁들어 있었다.
임지연이 마이바흐에서 내려오는 걸 목격했던 것이다.
해성시에서 마이바흐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몇 안 된다!
설령 고씨 가문이라 해도 마이바흐를 지닐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어머니한테 듣기로는 임지연이 밤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었는데 설마 어젯밤 밖에서 놀다가 어느 남자한테 매수를 당한 건가?
임지연은 자신보다 몇 개월 어린 여동생한테 그다지 호감이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임건국이 뒤에서 다급히 질문을 내걸었다.
“임지연! 너 어젯밤 어디에 있었어! 술집에 갔었다는 게 사실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밤새 밖에서 돌아다닐 수가 있어! 어디 여자가 할 짓이 없어서 이런 짓이나 하고 다녀! 남들이 널 뭐라 하는 줄 알아!”
임지연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임씨네 저택으로 돌아온 지 거의 1년이 다 돼가는데 임건국은 그녀한테 관심을 가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녀를 생각한답시고 엄한 아버지인양 연기를 하는 걸 보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
임지연이 답이 없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임건국은 당장 앞으로 달려가 손짓을 하려 했고 정순자는 서둘러 임건국을 막아섰다.
“여보, 그만해요. 화가 많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 지연이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부러가 아니라고? 어젯밤 어느 남자하고 같이 있었는지 누가 알아! 나중에 어딜 시집가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어!”
임건국은 점점 언성이 높아져 갔다.
임지연은 두 사람이 맞장구를 치는 모습에 입가에 비웃음이 물들었다.
그러던 찰나 임시월은 종종걸음으로 정순자한테 다가가더니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엄마, 방금 임지연이 마이바흐에서 내려왔었어! 시골 촌뜨기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나 대단한 인물을 마주치게 됐는지 누가 알아!”
마이바흐?
시가로 몇억, 더 나아가 몇 십억에 달하는 그 자동차?
임지연이 언제 그런 사람을 알게 된 거지?
“임지연! 너 무슨 이상한 짓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임건국은 즉시 눈을 부릅뜬 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상한 짓?
아무 남자하고 결혼한 게 어쩌면 이상한 행동일 수도 있겠네!
임지연이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임건국은 깊은숨을 들이쉬고 나서 손을 내저었다.
“됐어! 됐어! 어제 무슨 짓을 했던 간에 굳이 따져 묻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그리고 어제 고상준하고 파혼을 했으니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네 약혼자로는 황씨 가문의 황인호가 제격일 것 같아. 전에 너를 봤던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너한테 꽤나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상의한 바로는 내일 너한테 혼담을 꺼내러 오게 될 거야.”
황인호?
올해 마흔 살이 넘은 것도 모자라 전처가 반년 전에 사망하고 아들 둘이 딸린 그 남자를 말하는 거잖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내가 생전일 때도 밖에서 다른 계집애들이랑 술집을 드나들었었다고 했었는데...
게다가 전처도 그런 그의 행동에 화병이 생겨 돌아간 걸 수도 있다는 말들이 떠돌았었다.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남자하고 결혼하라고요? 이건 남편을 찾으라는 거예요? 아니면 새로 아버지를 하나 더 챙기라는 거예요?”
집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내뱉은 임지연의 말에는 빈정거림이 가득해 있었다.
임건국은 펄쩍 뛰며 그녀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너는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자라 가지고 촌티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서 그래? 황인호가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만으로도 너한테는 행운이야!”
“그딴 행운 필요 없어요. 정 원하시면 아버지한테 드릴 게요.”
임지연은 이 집안 사람들이 오늘 급하게 자신더러 돌아오라고 하는 걸 들었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었다.
임건국은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건넸다.
“넌 이 혼사를 거절할 자격이 못 돼. 우린 황인호의 예물도 다 받아놓은 상태야. 내일 황인호가 와서 너하고의 혼담을 꺼낼 거니까 넌 딴소리하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