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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다만 민용수도 어쩔 수 없었다. 시골의 보수 성향이 워낙 강하다 보니 소은비를 진안으로 전학시키지 않으면 그녀는 정말 갈 곳을 잃게 된다. 실은 그도 소은비가 좋은 남자를 찾아서 결혼하기 위해 진안에 왔다는 걸 알고 있다. 고향은 더 이상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최후의 방법이라면 아들 민준혁과 소은비를 결혼시켜주는 일이다. 늘 단아하고 조신하기만 하던 성해원은 화나서 친정으로 가버렸고 민용수 홀로 자신이 벌인 어수선한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비를 쫄딱 맞은 소은비는 앞머리까지 흠뻑 젖은 채 짐을 메고 민준혁을 따라 민씨 저택에 들어섰다. 순간 그녀는 숨 막힐 듯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고 입술을 앙다물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한편 소은혜는 그녀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넓고 환한 거실에 마치 집 구경을 온 사람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놀란 표정으로 저도 몰래 민준혁의 뒤에 숨었다. 하얗고 정갈한 벽에는 멋진 화보와 사진 액자가 몇 개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전부 군복을 입고 카리스마를 내뿜는 군인들인 걸 보아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군인 집안인 게 분명했다. 벽을 향한 갈색 탁자에 TV와 듀얼 카드 테이프 레코드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전부 흰색 레이스 천으로 덮여 있었다. 브랜드 선풍기는 매트가 깔린 원목 소파 앞에서 좌우로 회전하며 그녀 앞을 지날 때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민준혁의 집이 이 정도로 ‘부자’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나중에 민준혁과 결혼하거든 이 호화로운 2층짜리 별장에서 마음껏 뛰어다니며 호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 아빠, 저 왔어요. 여긴 소은비, 소은혜 자매예요.” 민준혁은 소은혜의 짐을 내려주고 소파에 앉아있는 두 분께 간단히 소개해드렸다. 거실을 쭉 둘러보았지만 엄마와 조카딸 민서아가 안 보였다. “엄마랑 서아는 이미 잠들었어요?” “왔어? 학교에서 너희 엄마 며칠 출장 보냈어. 서아도 함께 데려갔고.” 민용수가 대충 핑계를 둘러대며 두 자매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세히 소개하지 않아도 민용수는 소은비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17년 전, 전당 마을에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가 불행하게도 숲속에서 독사에게 물렸는데 그때 소성주가 그를 집까지 업고 와서 산에서 캐온 약초로 겨우 목숨을 구해줬다. 그 당시 소은비는 한 살도 채 안 된 갓난아기였는데 머루알같이 검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민용수에게 방긋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앙증맞았다. 아이는 제 몸집만 한 물병을 들고 그에게 물을 따라주며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녹아내릴 정도로 귀엽고 기특했다. 그때 민용수는 마음 같아선 소성주에게 이 딸을 입양하고 싶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나중에 부대에 돌아와서도 줄곧 딸을 낳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낳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북부에 파견된 둘째 아들이 올해 다시 진안시에 돌아와 군단장을 맡게 됐다. 민용수는 곧바로 우수한 아들을 소씨 가문에 보내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호감을 느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고 잘 안 되어도 소은비를 진안에 데려와 마땅한 직장을 찾아주고 진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평생 민씨 가문에서 보살펴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둘째 아들 준혁이가 보낸 편지는 아무런 답장이 없었고 소씨 가문에서 먼저 편지를 써 보내며 상황을 설명했다. “할머니, 아저씨, 안녕하세요. 학교 다니느라 여기까지 찾아와서 폐 끼치게 되었네요.” 근엄하고 예리한 눈빛의 민용수 앞에서도 소은비는 아주 침착하게 한 걸음 나서서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사투리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말투에 소파에 앉아있던 진영자마저도 돋보기를 위로 올리며 그녀를 자세히 훑어봤다. “네가 동생 은혜니?” “할머니, 아저씨, 제가 소은혜예요. 진안에 와서 실업 고등학교에 다닐... 생각이에요. 잘, 잘... 부탁드려요.” 옆에 있던 소은혜가 황급히 대답했지만 아직 세상 구경을 못 해본 시골 소녀였던지라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은비의 말투를 따라 하며 잔뜩 긴장한 채 말까지 더듬었다. 사투리를 안 쓰려고 노력은 했지만 여전히 구수한 억양으로 말을 내뱉어버렸다. 진영자와 민용수 모두 눈가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민준혁이 전화에서 말한 것과 너무 달랐으니까. “그동안 아저씨 덕분에 우리 집안도 무사히 지낼 수 있었어요. 3년 전 고향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아저씨가 보내주신 5킬로의 식량이 없었더라면 저랑 은혜는 진작 퇴학을 당했을 거예요. 이번에 이렇게 진안에 와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이건 저랑 엄마, 그리고 두 오빠들까지 새벽 3시에 나가서 따온 찻잎이자 우리 집안의 자그마한 성의이니 개의치 마시고 받아주세요.” 소은비가 짐보따리를 내리고 정갈한 쇠 상자를 꺼내서 공손하게 거실 탁자 위에 올렸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가에 겸손하고 친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에 옆에서 긴장과 불안에 떨고 있는 소은혜는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게 영락없는 시골 소녀였다. 소성주와 김민숙은 원래 옥수수랑 감자 등 집에서 심은 농작물을 몇 마대 준비했는데 이것들은 무거운 걸 떠나 권위 있는 민씨 가문에 아예 필요치 않은 물건들이었다. 마땅히 내놓을만한 선물이 없다면 온 마음을 다한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 금방 볶은 찻잎은 휴대하기 간편할뿐더러 이른 새벽에 따왔기에 받는 이도 기분 좋게 해드릴 수 있다. “아이고, 뭘 이런 것까지. 그해 너희 아빠 덕분에 나도 이 한목숨 건졌어.” 민용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소은비를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빠진 듯싶더니 아들 준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체 네가 전화로 말한 은비가 지금 이 은비 맞아?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민준혁도 사투리를 쏙 뺀 소은비의 유창한 말투에 눈썹을 치켰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는 길에서 그녀는 줄곧 사투리만 썼었다. 특히 겸손하면서도 차분한 모습은 가난한 시골 출신이긴커녕 교육을 잘 받은 지적인 집안의 딸과도 같았다. 그는 한없이 짙은 눈길로 소은비를 지그시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야,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아.’ “얼른 앉거라. 아줌마, 가서 뜨거운 수건 두 개 가져와. 얘네들 몸 좀 닦게.” 진영자는 웃음기를 싹 뺀 진지한 얼굴로 두 자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소은혜는 바짝 긴장해서 온몸이 경직됐다. 항상 자신보다 뒤처졌던 소은비가 지금 싹싹한 태도로 자신을 뛰어넘으려 하니 행여나 실수를 저지를까 봐 그녀를 따라 하며 의자 앞으로 다가와 반듯하게 앉았다. “고마워요, 아줌마.” 소은비는 가정부가 건넨 수건을 받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괜찮아요.” 오수미도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이 흐뭇해지고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 급상승했다. “고마워요, 아줌마.” 소은혜도 똑같이 말했지만 여전히 겁에 질린 목소리인지라 조심스럽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소씨 가문의 두 자매는 참 괜찮은 아이들이었다. 그저 동생이 조금 겁이 많고 사회성이 떨어져 언니처럼 침착하고 대범하게 처사하는 능력이 뒤떨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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