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그러게 말이야. 일부러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군인에게 치근덕거리잖아. 이건 엄연히 군인을 모함하는 짓이야. 정말 못됐다 저 여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기차에 오르기 전에 바닥에 주저앉은 소은비를 삿대질하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못됐네요. 얼른 경찰서에 풍기문란죄로 신고해서 저 여자 잡아가요. 저런 나쁜 년들은 콩밥 먹고 제대로 혼쭐이 나 봐야 정신을 차려요. 괜히 또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해칠라.”
누군가는 심지어 손에 쥐고 있던 바나나 껍질을 소은비에게 내던졌다.
그 광경을 본 소은혜는 마냥 흐뭇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애초에 소은비가 함께 진안시에 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소은비는 마땅히 마을에 남아서 40대 노총각에게 시집가야만 했다.
만약 풍기문란죄로 경찰서에 끌려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이때 소은비가 입꼬리를 씩 올리고 힘껏 허벅지를 꼬집더니 눈시울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울먹이며 소은혜의 손을 잡고 서글프게 울었다.
“은혜야, 넌 내 친동생이잖아. 아까 자리에도 없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날 오해하는 거야?”
“방금 어떤 아저씨가 들고 있던 짐보따리가 내 등에 쏟아지면서 몸이 앞으로 쏠렸을 뿐이야. 앞에 있는 사람이 준혁 씨일 줄은 전혀 몰랐어. 그저 군복을 입고 있길래 군인을 향한 서민의 믿음으로 덥석 잡고 보니 준혁 씨였던 거야. 난 단지 넘어지기 싫어서 그랬을 뿐이야...”
“이경 씨가 나 대신 입증해줄 수 있어.”
소은비는 말하면서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맑고 투명한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니 마치 한 떨기 꽃에 맺힌 이슬처럼 연약하고 안쓰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래요, 단장님. 이번엔 정말 단장님께서 은비 씨를 오해하신 거예요. 은비 씨는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한이경이 얼른 옆에서 해명하며 방금 있은 일을 다시 한번 상세하게 설명해 드렸다.
그는 소은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다가 너무 갑작스럽게 그 사달이 벌어진 바람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장 먼저 짐보따리를 든 아저씨를 불러세운 건 한이경이었다.
“맞아요. 다 제 잘못이에요. 아까 우리 애가 부르길래 홱 돌아서다가 그만 이 여성분한테 짐이 쏟아지고 말았어요.”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도 미안함이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민준혁은 한이경을 빤히 쳐다보았고 이에 한이경이 재차 머리를 끄덕였다.
‘단장님께서 정말 은비 씨를 오해했어요. 은비 씨는 억울해요.’
옆에 있던 소은혜는 이런 반전이 일어날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다. 그녀는 서둘러 자책하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 언니. 난 그저 준혁 오빠가 언니를 밀치길래 남녀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언니가 여전히 오빠를 좋아하고 만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다 내 잘못이야.”
“은혜야, 물론 내가 먼저 준혁 씨랑 선봤고 엄마, 아빠도 결혼을 부추겼지만 내가 분명 시집 안 간다고 말했잖아. 너도 어젯밤에 주방에서 전부 엿들은 거 아니었어?”
“만약 준혁 씨 만날 마음이 있었다면 내가 뭣 하러 엄마, 아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했겠어? 대체 넌 왜 이렇게 날 오해하지 못해 안달인 건데?”
소은비가 조리 정연하게 되물으며 맑은 눈동자로 소은혜를 쳐다보더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꼭 마치 자매지간의 정이 매우 깊었는데 갑자기 동생에게 상처를 받아 속상해 마지않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녀는 소은혜가 이 일로 물고 늘어질 줄 진작 알았다. 일부러 그 사건을 꺼내지 않고 소은비 스스로 불구덩이에 빠지게 할 작전이었다.
이토록 꼼수가 많은 상대 앞에선 반드시 그녀보다 더 연약하고 가여운 척, 무고한 척을 해줘야 한다.
“애초에 민 장교랑 선 본 사람이 언니였네. 언니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동생한테 차려진 거였어. 그러게 내가 뭐랬어? 언니가 동생보다 훨씬 예쁘고 천사가 따로 없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벌였겠냐고.”
주위 사람들은 이 말을 듣더니 하나둘씩 소은비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이야. 민 장교랑 언니분이 훨씬 잘 어울려. 동생은 뭔가 2프로 부족한 관상이야. 혹시 민 장교가 동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게 아닐까? 다들 호락호락하지가 않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의논 소리에 좀 전까지 거들먹거리던 소은혜는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금세 가여운 표정으로 소은비의 손을 잡아서 제 뺨을 내리쳤다.
“미안해, 언니. 다 내 잘못이야. 차라리 날 때려. 오해해서 정말 미안해.”
“괜찮아. 이제 대화로 다 풀었으니 앞으로 더 이상 날 오해하면 돼.”
소은비가 재빨리 손을 거둬들이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질책하지도, 화내지도 않고 오히려 너그럽고 자상하게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 바람에 소은혜는 불쌍한 척하려던 계략이 실패했을뿐더러 소은비만 동생을 아끼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언니로 거듭났다.
또한 이제 더는 이 일을 빌미로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쐐기를 박았다.
소은혜는 주먹을 꽉 쥐더니 싸늘한 눈가에 언짢은 기색이 스쳤지만 또 곧장 얌전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어. 이젠 안 그럴게.”
“이 일은 내 잘못이니 나중에 은비한테 제대로 반성할게. 기차가 곧 출발할 거야. 다들 일단 기차에 타서 얘기해.”
이때 민준혁이 엄숙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차가운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는 짙은 눈동자로 소은비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대롱대롱 맺힌 눈물을 보자 진심으로 본인 잘못을 인정했다.
역시 여론의 힘이 대단하긴 한 거구나. 그토록 거만하고 쌀쌀맞던 남자도 선뜻 고개 숙여 사과하는 날이 오다니.
“그래요, 다 지나간 일이에요.”
소은비가 눈물을 닦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방금 세운 차 쪽으로 걸어갔다.
한이경은 원래 그녀를 좀 더 달래주려고 했는데 소은비가 이토록 사려 깊고 성격이 좋을 줄은 몰랐다. 만약 다른 여자였다면 이런 식으로 오해받았을 때 엉엉 울면서 민준혁에게 투정을 부릴 게 뻔했다.
‘단장님은 대체 왜 소은비 씨한테 이렇게까지 큰 적의를 품은 걸까? 설마 은비 씨가 단장님을 별로라고 해서?!’
한이경은 얼른 생각을 접고 민준혁을 힐긋 쳐다본 후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대신 짐을 들어주었다.
“저는 또 언니가 집에서처럼 소란을 피울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오해를 했네요. 다 제 잘못이에요, 오빠.”
소은혜는 다친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민준혁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푹 숙인 채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네 탓 아니야. 얼른 가자.”
민준혁의 머릿속엔 아직도 방금 소은비가 덮쳐들었을 때 아예 그의 품에 닿았던 두 손이 맴돌았다...
그는 한없이 짙은 눈동자로 생각했다.
‘고의가 아니길 바라. 일부러 넘어진 척하며 기회를 노릴 생각 따위 집어치워!’
기차표는 오늘 한이경이 샀는데 너무 급하게 산 바람에 침대열차가 없고 일반 열차로만 네 좌석을 구매했다.
그래도 1박 2일 동안 걸릴 텐데 일반 열차를 구매했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기차에 오른 후 소은비는 김민숙이 준 달걀을 바로 꺼냈다. 무더운 날씨에 음식을 오래 둘 수 없었고 마침 네 사람이라 한 명씩 나눠주었다.
민준혁이 힘껏 밀치고 따끔하게 혼내서 몹시 화나고 억울하긴 하지만 그녀 또한 부주의로 만지지 말아야 할 곳을 만져버리고 말았다.
보수적인 80년대에서 이런 일은 초토화가 아닐 수 없다. 하여 민준혁이 그토록 화낸 것도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또한 그는 아직 첫 경험이 없는지 반응이 아주 예민했다. 거의 만지는 즉시 우뚝 서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