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3장

“맞아요. 은비는 줄곧 나랑 몰래 만나왔어요. 학교 다닐 때 항상 내가 대신 가방도 들어줬고요.” 허강훈도 뒤질세라 한마디 덧붙였다. 민준혁은 두 모자를 샅샅이 훑어봤는데 정갈한 옷차림에 반짝반짝 빛나는 자전거, 그리고 옆에 챙겨 든 몇몇 선물 상자까지 더해져 혼사 얘기를 꺼내러 온 게 틀림없어 보였다. 순간 민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소은비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위선적이고 권세에 눈이 멀었으며 돈을 엄청 밝히는 여자였다. 그녀의 학교에 찾아가 대신 전학 신청을 할 때 그녀의 성적표를 얻게 되었는데 벌써 몇 과목이나 불합격이었다. 이 수준이면 전학을 안 가도 퇴학을 당하기 일쑤였다. 어제 소은비가 김민숙에게 했던 말은 민준혁의 예상대로였다. 진안시에 가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대학까지 붙겠다던 그 말은 더 높은 곳에 기어오르고 더 나은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함이었다. 민준혁이 학교를 떠날 때 소은비의 담임마저 그녀를 삿대질했다. 이 학교에 다니는 건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괜찮은 남자를 물색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또 더 하실 말씀 남았나요?” 민준혁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는데 시간이 매우 빠듯했다. 더는 그들과 얘기를 나눌 여유가 없자 그가 차갑게 되물었다. “은비는 줄곧 우리 강훈이한테 비밀연애만 하자고 했어요. 일단 강훈이를 옆에 잡아두고 더 나은 상대를 찾고 있는 거죠. 그러니 장교님도 절대 은비한테 속으면 안 돼요. 조심하세요.” 민준혁이 뜻밖에도 말을 잇지 않자 허강훈 엄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또 한 마디 더 보태고는 허강훈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 시각 김민숙은 집 문 앞에 서서 저 멀리 길목에 세워진 지프를 보더니 얼른 두 딸더러 짐을 챙겨서 길목으로 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마침 소씨 가문으로 오는 민준혁과 길에서 마주쳤다. 소은비는 잔꽃 무늬 반팔 셔츠에 포니테일을 묶고 잔머리가 몇 가닥 흘러내렸다. 등에는 커다란 짐보따리를 메고 있었다. 6월의 눈 부신 햇살이 그녀를 쨍쨍 내리쬐었다. 늘씬한 몸매와 깐 달걀 같은 피부는 탱글탱글하고 백옥처럼 새하얗게 빛났다. 갸름한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망울, 오뚝한 콧날과 빨간 입술까지 어우러져 말 그대로 상큼한 과즙상이었다. 청순가련하면서도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신 미모에 사람들은 선뜻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한편 큰 오빠 소은찬의 등에 업힌 소은혜도 똑같이 포니테일을 묶고 꽃무늬 헤어밴드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선볼 때 입으라고 친히 사주신 연분홍 반팔 셔츠를 챙겨입었지만 예쁜 미모에 비해 피부가 조금 어둡고 야위어서 옆에 있는 소은비와 비교하니 이목구비가 밋밋할 따름이었다. “준혁 오빠, 안녕하세요.” 소은혜가 수줍게 말했다. 편지에서 민준혁이 그녀더러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으니까. 한편 민준혁은 김민숙과 소은찬에게 인사한 후 소은비를 대충 흘기고 소은혜에게 시선을 옮기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은혜야, 잘 지냈어?” 이어서 김민숙이 메고 있는 짐보따리를 건네받았다. “안녕하세요, 준혁 씨.” 이때 소은비가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선뜻 그에게 인사했다. 민준혁은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그녀의 소개서를 건네주었다. “오빠, 제 거는요?” 소은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여기 있어. 내가 대신 보관해둘게.” 민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 속에서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려는 압박감이 전해졌다. 민준혁은 지금 소은비를 경계하고 배척하고 있다. 그녀가 행여나 소은혜의 소개서를 갈기갈기 찢을까 봐... 그도 그럴 것이 원주인의 성품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다. “네, 고마워요 오빠.” 소은혜는 수줍은 듯 시선을 떨구고 내심 흐뭇해졌다. ‘오빠도 내가 좋은가 보지?’ 민준혁이 지금 자신을 지켜주고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다는 걸 소은혜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문득 뒤에 떨어져 있는 소은비에게 시선이 갔다. 그 시각 소은비는 앞만 바라보며 진안시에서 어떻게 살아나갈지 계획하고 있었다. 진안에 가면 모든 걸 홀로 해내야만 한다. 민씨 가문은 이 몸 주인 소은비가 민준혁을 빼앗아오기 위해 동생을 해치고 강에 빠져 자살 소동까지 벌인 걸 알고 있을 테니 분명 그녀를 아니꼽게 여길 것이다. 그녀 또한 누군가에게 얹혀사는 삶은 원치 않는다. 우선 숙식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찾아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개학하면 학교에서 지내면 되고 대학에 붙을 때까지 버텨내면 된다. 한편 김민숙은 좀 전에 허강훈 엄마가 혼사 얘기로 찾아온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소은비가 헌신짝이 된 일이 대체 어떻게 소문이 퍼져나간 걸까? 곧 있으면 온 마을에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소은비의 가녀린 팔을 꼭 잡고서 연신 당부했다. 진안에 가면 빨리 남자친구를 찾아야 한다고, 이 일이 소은비가 진안에 가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군인은 포기해야 하겠지만 고학력자들은 나름 희망이 있다. 나중에 진안에 남아서 시댁 식구들이 직장까지 마련해주면 글을 읽는 것보다 훨씬 낫다. “네, 알았어요.” 소은비는 엄마 때문에 생각이 다 흐트러졌다. 대학에 붙겠다고 설명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그녀는 결국 엄마의 뜻대로 고분고분 머리를 끄덕였다. “진안에서 꼭 남자친구 만나서 결혼해야 해.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시집을 못 가면 그때 다시 전당 마을에 돌아와도 다 늙은 영감탱이한테 시집가는 수밖에 없어.” 김민숙은 말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소은비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소은혜는 똑똑하고 복이 많은 아이라 딱히 걱정할 것 없지만 소은비는 지금 궁지에 몰린 상태이다. 소은비는 이 시대의 엄마 생각을 너무 잘 이해하기에 가볍게 손을 잡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진안에 가면 3개월 이내로 무조건 남자친구 찾을게요.” 그녀는 사실 현실 세계에서도 가족들에게 결혼을 재촉받고 있으니 이 시대의 결혼 재촉 방식이 더더욱 심하다는 걸 예측할 수 있었다. 김민숙을 확실하게 안심시키지 않으면 하루가 멀다 하게 편지에 전화를 해올 테고 심지어 자칫하면 진안까지 그녀를 찾아올 게 뻔했다. 시름 놓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붙으려면 우선 선의의 거짓말로 김민숙의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진안에 가서 개학할 때쯤 엄마에게 편지를 써서 남자친구를 만났다고 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야 결혼식을 올린다고 말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해서 김민숙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중에 대학에 가거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된다. “그래, 알았어.” 소은비의 다짐을 들은 김민숙은 훨씬 안심하며 코를 훌쩍거렸다. 소은비의 미모라면 3개월 안에 소란을 피우지 않는 한 바로 남자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준혁은 두 모녀가 뒤에서 쉴 새 없이 남자친구에 대해 의논하는 걸 들으며 걸음을 다그쳤다. 3개월 안에 좋은 남자를 만나 더 높은 곳에 기어오르겠다고? 그의 어둡고 싸늘한 눈빛에 야유가 스쳐 지나갔다. 길목에 세워둔 지프 앞에 도착한 후 김민숙은 여전히 아쉬운 마음으로 두 아이에게 당부했고 눈시울까지 빨개졌다. 소은혜는 앞으로 방학 때마다 집에 돌아올 수 있는데 소은비는 조금 어려울 것이다. 김민숙은 집에 얼마 남지 않은 달걀을 얼른 소은비에게 건넸다. 운전석에 올라탄 민준혁은 백미러로 이 모습을 덤덤하게 지켜봤다. 소은비는 달걀을 파란색 가방에 넣고 반듯하게 앉아서 백미러에 담긴 민준혁의 짙고 예리한 눈빛과 마주쳤다. 훤칠하면서도 포스가 넘치는 그의 눈썹은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고 무언의 압박감을 주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