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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9월의 은성은 비가 내려서 며칠 시원하더니 또다시 기온이 확 올라갔다. 안이서는 한창 가게 인테리어에 몰두하며 이제 막 시공 기사의 요구대로 부품을 사서 돌아왔는데 또다시 계모 소현정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서야, 내일 저녁 7시에 잊지 말고 꼭 주경 호텔로 와.” “내가 왜요? 요즘 가게 인테리어 때문에 바빠서 시간 없거든요.” 시끄러운 시공 소리가 울려 퍼지고 소현정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안이서가 매정하게 툭 끊어버렸다. 실은 그녀의 언니 안채아가 어제 전화로 다 얘기해줬었다. 이복동생 안재준이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와 아이가 생기자 예비 장인 장모가 은성시에 새집 한 채 장만하지 않으면 아이를 지우고 관계를 끝내라고 요구했다. 소현정은 고향 마을 이장 아들이 안이서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진작 알고 있다. 안이서의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화려한 스펙을 내세우며 소현정은 이참에 예물 값으로 1억2천이나 요구했다. 방금 그 전화는 바로 그녀더러 돌아가서 결혼식을 올리라고 다그치는 전화였다. 소현정이 이렇게 나오는 데에는 안이서의 아빠 안재원의 뜻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 그해 안채아가 결혼할 때도 소현정은 예물 값으로 6천만 원이나 요구하더니 그 돈으로 곧장 아들에게 차를 사주었다. 바로 이런 고가의 예물 값으로 인해 안채아의 시어머니는 항상 며느리가 돈 주고 사 온 여자라면서 더더욱 얕잡아보았고 게다가 남편도 마마보이인지라 결혼 생활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다만 안재원과 소현정은 사돈집에서 예물 값을 돌려달라고 요구할까 봐 딸 안채아가 겪는 서러움을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러더니 지금 또 안이서의 결혼을 부추기면서 예물 값으로 안재준의 집 살 돈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절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때 마침 그녀의 집주인 아줌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지난번에 조카랑 선보기로 한 일은 고민을 다 했냐고 물어왔다. 안이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아줌마. 지금 바로 그 카페로 갈게요.” 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가게 인테리어 기사님께 인사하고는 부랴부랴 자리를 떠났다. ‘일단 아무나 만나서 결혼해야 해. 그래야 저 인간들 더는 나한테서 예물 값 받아내지 못하지.’ 곧이어 안이서는 약속장소인 은성시 오성급 호텔 커피숍에 도착했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창가 쪽 테이블에 정장 차림의 잘생긴 남자를 발견했다. 남다른 포스를 보아하니 집주인 아줌마의 조카가 맞는 것 같았다. 전형적인 대기업 직원 느낌이 났으니까. 그녀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그 남자의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보기로 한 안이서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이 말을 들은 남자는 잘생긴 눈썹 아래 길게 째진 매력적인 눈매로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 예쁜 외모에 아담한 체형, 귀여운 똥머리를 묶은 그녀는 나름대로 참하고 얌전해 보였다. 심플한 흰 티에 데님 반바지, 그리고 화이트 슈즈를 매치해 청순하면서도 내추럴한 룩을 완성했다. 이 모습에 연준호는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연씨 일가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명문가에 속하는데 설마 할아버지께서 온갖 재벌 집 딸들을 소개했다가 실패하더니 이번엔 아예 색다른 버전으로 바꾸신 걸까? 한편 안이서의 예의 바르고 친절한 태도가 나름 마음에 들어 연준호도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앉으세요.” 안이서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고 종업원도 그녀한테서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받고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아줌마가 제 사정 다 얘기하셨죠? 집에서 결혼을 다그치는데 저는 아직 그럴 마음이 없거든요.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그냥 초고속 결혼을 해버리기 위해서예요. 받아들일 수 없다면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상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집에서 결혼을 다그치는 건 확실히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다. ‘이 여자 꽤 흥미롭네?’ 연준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서 씨가 괜찮다면 저도 오케이예요. 필요한 서류를 다 챙겨왔으면 지금 바로 가서 혼인신고하죠?” 말을 마친 연준호가 얼른 자리를 떠나려 했다. 안이서는 재빨리 그를 말리며 재차 확인했다. “정말 괜찮은 거죠?” 안이서의 아빠와 계모는 사람을 피 말릴 정도로 못살게 군다. 소현정이 내일 당장 그녀를 끌고 가서 결혼식을 올리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안이서가 지금처럼 아무나 잡고 결혼을 다그치려고도 안 했을 것이다. 한편 초고속 결혼일 뿐이니 연준호도 딱히 번거로울 건 없었다. 그도 하루빨리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뤄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르신은 종일 집에서 목숨으로 협박하며 그에게 결혼을 다그쳤으니까. “가요 얼른. 나 엄청 바쁘니까 시간 지체하지 말고.” 연준호는 두 회의 중간에 시간을 조금 짜내서 결혼하러 나왔다. 상대의 의지가 이토록 단호하니 안이서도 더는 망설이지 않고 통쾌하게 혼인신고하러 갔다. 따끈따끈한 혼인신고서를 들고 구청에서 나온 후 안이서는 위에 적힌 이 남자의 이름을 읊었다. “연준호?” “네.” 연준호는 그녀를 힐긋 보며 대답했다. 안이서는 이 이름이 왠지 모르게 찝찝했지만 또 어디가 잘못됐는지 콕 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이때 연준호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할아버지한테 걸려온 전화인데 아무래도 손주 녀석이 혼인신고한 사실을 알아버린 듯싶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어르신의 분노에 담긴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야 이놈아! 감히 또 날 바람맞혀? 이 늙은 노인네가 이젠 신경도 안 쓰이지?”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연준호는 의아한 눈길로 안이서를 힐끔 바라봤다. 그는 이미 얌전히 혼인신고까지 마쳤는데 대체 뭘 또 잘못했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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