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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우리가 서로 안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네 과거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어... 낙태를 네 번 했다는 사실도 포함해서.” “하지만 모든 일엔 원인이 있기 마련이야. 네가 한 행동이 결과이니 원인이 당연히 좋지 않았을 거야.” 연준호의 이 말에 안이서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며 참아왔던 눈물이 그만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언니와 서로 의지하며 버티는 것 말고는 대학 때 백지효와 몇몇 룸메이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소현정의 횡포에 밀려 친구들조차 하나둘 떠나갔다. 대학 시절 안이서를 짝사랑하던 선배도 소현정의 한마디에 완전히 변해버렸다. 안이서는 그 남자가 원래부터 문제 있는 사람이고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 그가 보냈던 경멸 가득한 눈빛과 경솔한 말들, 돈을 더 줬으면 그녀가 ‘밀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듯한 모욕적인 행동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고마워요, 준호 씨, 이렇게 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안이서는 진심으로 연준호에게 고마웠다. 그 선배처럼 이유도 묻지 않고 자신에게 편견을 두지 않은 그에게 감사했다. 오늘 밤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준호는 안이서를 집에 데려온 후 자신이 준비했던 거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고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연준호가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내려왔을 때 안이서는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 식탁 위에는 그를 위해 준비한 아직 따뜻한 아침 식사와 함께 짧은 메모가 놓여 있었다. [준호 씨, 오늘 가게가 바빠서 먼저 갈게요.] 안이서의 글씨는 귀여웠고 메모 끝엔 전기 스쿠터를 타고 가는 작은 소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연준호는 여성이 독립적으로 일을 꾸려나가는 걸 지지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열정적인 안이서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젯밤 일에 감정이 무너뜨리지 않았다는 것도 칭찬할 만했다. 그는 안이서가 이 정도로 강인한 여성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연준호는 식탁에 앉아 안이서가 준비한 토끼 모양의 샌드위치를 먹으며 메모에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도대체 어떤 가게를 운영할까?’ 한편 연준호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안이서와 백지효는 이미 아침 장사를 한 차례 마친 상태였다. 두 사람의 가게는 대학가에서 운영되고 있어 장사가 매우 잘되고 있었다. 이제 8시 반쯤이 되자 학생들은 대부분 수업에 들어갔고 가게도 한가해졌다. 안이서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어제 네가 말한 군고구마 정말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군밤 기계도 한 대 들여오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어젯밤에 바로 주문했어. 아마 내일쯤 도착할 거야.” 백지효는 남은 두유를 마시며 말했다. “이서야, 아침 장사도 끝났으니 이제 어젯밤 얘기 좀 해볼까?” 안이서는 백지효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자백했다. 안이서의 이야기를 들은 백지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내가 물건 사러 나간 그 일주일 동안 너한테 그런 일이 생겼다니 진짜 결단을 내린 거네.” “아니면 어떻게 하겠어? 아빠 말을 듣고 시골에 있는 그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잖아.” 안이서는 상대의 이름조차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고향의 그 사람들을 떠올리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들은 도저히 대화가 통할 수 없는 수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응. 이번에 충동적으로 결혼한 건 우연이지만, 네 남편을 보니 혹시 하늘이 내려준 대표님일 수도 있겠는데!” 백지효는 또다시 머릿속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안이서는 백지효의 그런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맨날 안이서를 구원할 백마 탄 대표님이 나타날 거라 상상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과 결혼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진짜라니까! 내 말 믿어. 네 남편 진짜 억만장자 대표님일지도 몰라. 그 사람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너...” 그 순간 갑자기 가게 문이 열리더니 한 선글라스를 낀 패셔너블한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네 남편도 충분히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가게에 오시는 손님이 더 멋지잖아!” 안이서는 그제야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할아버지는 은테 둥근 안경을 쓰고 멋진 갈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굉장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안이서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환한 미소로 물었다. “어르신, 뭐 찾으세요?” 그 할아버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가게는 순백과 핑크색으로 꾸며져 있었고 입구에는 간식과 음료가 진열되어 있었으며 안쪽에는 문구류와 다양한 털실로 만든 장식품과 인형 등이 진열돼 있었다. 가게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물건들도 모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안이서를 바라보더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가씨가 이 가게 사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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