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윤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은우는 언뜻 태연해 보여도 사실은 표정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휴대전화는 계속해 울렸다. 전화가 걸려 오거나 영상 통화가 계속 걸려 왔는데 마지막에는 문자가 미친 듯이 날아오기도 했다.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분위기가 또 한 번 얼어붙었다.
“안 받아?”
윤지현이 차갑게 말하자 심은우는 그제야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휴대전화를 쳐다보지도 않고 꺼버린 뒤 다시 침대맡 서랍 위에 올려두었다.
심은우는 윤지현의 이마를 만지면서 말했다.
“아직 좀 뜨겁네. 괜찮아. 넌 쉬어.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게.”
윤지현은 침대에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한 시간 뒤 윤지현은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가 아주 규칙적이었다.
심은우는 서랍 위에 두었던 휴대전화를 챙겨서 베란다로 향했고 휴대전화를 켜서 문자를 확인한 뒤 전화를 걸었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지금 바로 갈게.”
그는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가서 겉옷을 챙겼다.
그의 등 뒤에서 윤지현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녀는 처음부터 잠이 들지 않았다.
윤지현 본인도 자신이 뭘 기대한 건지 알지 못했다. 마음이 변해버린 남자는 변질된 과일처럼 점점 더 썩어갈 뿐인데 말이다.
새벽 네 시, 심은우가 돌아왔다.
윤지현이 여전히 자고 있자 심은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열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뒤, 가운을 입고 나온 심은우는 윤지현의 뒤에 누워 그녀의 허리를 안고 잠이 들었다.
윤지현은 심은우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한 뒤 허리에 놓인 그의 손을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나 싸늘한 눈빛으로 잠이 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심은우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다. 얇은 입술과 섹시한 목젖, 그리고...
윤지현의 시선이 쇄골에 빼곡히 남은 잇자국으로 향했다.
순간 심장이 꿰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또...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몸뚱어리가 보였다. 순간 윤지현은 베개로 그를 질식시켜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
잠에서 깬 심은우는 윤지현이 먼저 일어난 걸 발견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윤지현이 두 사람이 먹을 아침을 준비해 놓고 그를 부르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열 내린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조금 더 자두지 그랬어.”
심은우는 윤지현의 이마를 만져보려고 했으나 윤지현이 티 나지 않게 그의 손을 피했다.
“감기일 뿐인데 뭐. 괜찮아.”
윤지현은 앞치마를 벗고 자리에 앉았다.
심은우는 허공에 멈춘 손을 보고 무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윤지현이 화가 풀린 것 같아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할 얘기가 있어.”
윤지현이 입을 열었다.
“뭔데?”
심은우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나 일 그만두고 싶어.”
윤지현의 말에 심은우는 깜짝 놀랐다. 그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윤지현이 설명했다.
“그동안 너무 일만 해서 힘들어. 그래서 당분간은 재벌가 사모님으로서 편하게 지내고 싶어.”
심은우는 미묘한 눈빛으로 윤지현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농담 아니고 진심이야?”
“농담 아니야. 왜? 설마 내게 자학하는 취미가 있어서 편하게 사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윤지현이 웃으면서 되물었다.
심은우는 잠깐 생각한 뒤 동의했다.
“회사 안 다니는 것도 좋지. 넌 집에만 있어. 이 기회에 우리 아이를 가지자.”
윤지현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흥, 꿈 깨. 내가 네 아이를 낳아주는 도구인 줄 알아? 넌 네 캔디랑 계속 만나면서 즐겨.’
“그러면 사직서 내고 절차 밟을게. 난 유진이랑 유럽에 가볼 생각이야. 오랜만에 여행하고 싶거든.”
“거기 로펌 바쁘지 않아? 너랑 같이 여행 갈 여유가 있다고?”
“바쁘지. 그런데도 나랑 같이 가려고 일부러 시간을 뺐어.”
윤지현은 웃으면서 말했다.
심은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는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여행도 좋지. 내가 미리 일정 짜줄게.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이 그냥 편하게 놀다 와.”
윤지현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심은우와는 이미 끝난 상태일 것이다.
이마의 상처가 너무 눈에 띄는 바람에 윤지현은 지금 이 시기에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모습으로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아서 며칠 쉬었다.
시간이 충족하다 보니 윤지현은 매일 옷이나 신발, 가방 같은 것들을 천천히 챙겨서 새로운 집으로 옮겼다.
오늘 조금 옮기고 내일 또 조금 옮기다 보니 서랍이 눈에 띄게 텅 비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심은우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윤지현은 그의 앞에서 두 사람의 결혼사진을 챙겨 정원으로 나가서 불태워버렸다. 그 순간조차도 심은우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만 보면서 이따금 웃으며 즐겁게 문자를 보냈다.
그가 한순간이라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면, 통유리 밖에 서 있는 아내를 보았다면 결말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윤지현은 노을 아래 서서 웃음기 가득한 심은우의 얼굴을 조용히,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꽃이 손끝에 닿아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에야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불꽃이 기름을 집어삼키면서 철통 속 두 사람의 결혼사진을 불태웠다. 사진 속 윤지현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고 심은우는 그런 그녀를 눈에 담고 있었다. 심은우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불길에 녹았고 마지막에는 검은 잿더미가 되었다.
숨 막히는 기분에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잿더미를 바라보던 윤지현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뭘 태우고 있었어?”
심은우는 그제야 밖에 그녀가 있는 걸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윤지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별거 아냐. 그냥...”
윤지현은 고개를 돌려 심은우를 바라보았다. 살짝 빨개진 그녀의 눈동자에서 부드러운 웃음기가 보였다.
“쓰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