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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심은우가 바람을 피웠다. 윤지현은 그의 사무실 밖에 서서 마치 얼음에 둘러싸인 사람처럼 온몸으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색 하이힐이 검은 무늬의 대리석과 한데 섞일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지현은 조용히 들고 있던 서류를 손에 꼭 쥐면서 다른 손으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윤지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장 남자의 곁으로 걸어갔다. “바빠? 여기 급하게 사인해야 할 서류가 있어.” 윤지현은 바쁘냐고 물으면서 그에게 서류를 들이밀며 세심하게 그가 사인해야 할 곳을 가리켰다. 심은우는 제노스로 출장을 갔다가 오늘 오전에야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회사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앞에는 많은 서류가 놓여 있었고 잘생긴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그는 윤지현이 내민 서류를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 위에 사인했다. “고생했어.” 윤지현은 사인한 서류를 챙긴 뒤 자연스럽게 물었다.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야?” “저녁에는 따로 볼일이 있어. 기다리지 마.” 심은우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난 이만 나가볼게.” 윤지현은 서류를 안고 돌아섰다. 몸을 돌렸을 때 그녀의 미소는 비웃음이 되었다. 사무실에 딸린 휴게실을 지나칠 때 안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침대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소파 쪽을 보니 테이블 위에 간식 포장지와 마시다 만 티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핑크색 하이힐이 쓰러져 있었다. 그 순간 뭔가를 깨달은 윤지현은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윤지현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모든 힘을 다 쓴 듯 그녀는 자리에 앉으면서 아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윤지현은 서류 뭉치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서류를 골라냈다. 그건 이혼합의서였다. 마지막 장을 확인한 윤지현은 경멸 어린 표정으로 그 위에 사인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예전 기억들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애정 어린 표정으로 결연하게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하던 심은우의 모습, 평생 한 사람만을 바라보면서 사는 남자는 없다며 코웃음 치던 시어머니의 모습, 그런 그녀에게 우리는 다를 거라고 말하던 자신의 모습... 그러나 두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은우는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고 그 사실을 잘 숨겼다고 자부하면서 마음 편히 바람을 피웠다. 이번에 출장을 갔을 때도 심은우는 그 여자를 데리고 함께 떠났고 심지어 돌아와서는 그 여자를 회사로 데려왔다. 손을 거두어들인 윤지현은 이혼합의서에 적힌 사인을 사진으로 찍어서 시어머니에게 보냈다. [사인했어요.] 일주일 전 윤지현은 시어머니와 조건을 논의했다. 시어머니는 윤지현이 먼저 이혼을 언급하기를 바랐고 동시에 두 사람이 남몰래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 대가로 윤지현은 2,000억을 받기로 했다. 한 달 뒤, 심은우는 그녀의 세계에서 완전히 퇴출당할 것이다. 똑똑. 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윤지현은 이혼합의서를 보이지 않게 해두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심은우의 비서 허지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과장님, 이건 대표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허지호는 어두운 녹색의 벨벳 케이스를 그녀의 앞에 놓았다. 아무렇지 않게 케이스를 열어 본 윤지현은 안에 비싼 다이아몬드 주얼리가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윤지현의 머릿속에 가장 처음 떠오른 것은 아련한 눈빛을 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가운을 입은 채 뻔뻔하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들고 있는 모습과 여자의 등 뒤를 비추는 어두운 조명, 너저분한 침대, 유독 눈에 띄는 가슴 쪽의 키스 마크였다. 역겨워서 속이 울렁거렸다. “고마워요. 허 비서님.” 시선을 든 윤지현의 눈빛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허지호는 그녀의 눈빛에 등골이 섬뜩해져서 저도 모르게 말을 보탰다. “대표님께서 정성 들여 고르신 겁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심은우의 마음은 하나가 아니었고 윤지현은 더는 그를 원하지 않았다. 윤지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런가요? 정말 감동이네요.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제 선물까지 골라줬으니 말이에요.” 뭔가 뉘앙스가 이상했다. ‘혹시 대표님과 구서희 씨가...’ 허지호는 순간 식은땀이 흘러 빠르게 사무실에서 나왔다. 윤지현은 마치 더러운 것을 보듯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책상 위에 놓인 주얼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럭셔리 브랜드의 중고 제품을 판매하는 사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거 대신 팔아주실 수 있나요? 돈은 지적 장애 재단에 기부해 주세요.] 문자를 받은 사장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 오후 다섯 시, 주차장. 윤지현은 자신의 차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가서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려고 했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맞은편에 있는, 이미 시동이 걸린 차를 보았다. 창문 너머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심은우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있는 단발머리 여자가 보였다. 여자의 작은 얼굴은 동그랗고 귀여웠으며 생기와 활력이 넘쳐 보였다. “대표님!” 허지호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공기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윤지현과 심은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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