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또 한 번 침묵이 이어졌다.
심은우가 말했다.
“오늘은 다급해서 그랬던 거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만 얘기해.”
심은우의 말을 들으니 윤지현은 속이 울렁거렸다.
“일부러 그랬든 실수로 그랬든 네가 날 밀쳤다는 건 사실이야.”
“그래, 맞아. 내 잘못이야.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줄래? 지금 당장 알아야겠어.”
“돌아간다고 했잖아.”
“오늘 밤 반드시 돌아와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운성을 전부 뒤져서라도 널 찾아낼 거니까.”
심은우는 점점 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
윤지현은 결국 한 시간 뒤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약속했다.
심은우는 정말로 미친 짓을 할 인간이었다. 그녀는 심은우에게 새집 주소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고유진이 윤지현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자식 그렇게 많은 잘못을 저질러놓고 감히 네 앞에서 큰소리치며 떵떵거리네. 성격도 더럽고 통제욕도 정말 진절머리 나... 지현아, 심은우 그 자식 말이야. 네가 그 자식을 속여서 이혼합의서에 사인하게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정말로 널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난 그게 겁나.”
윤지현은 먼 곳의 네온사인을 바라보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독약이라도 준비해야겠어. 심은우가 날 죽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독을 써서 심은우를 죽이는 거야.”
집으로 돌아와서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심은우가 발 빠르게 그녀를 맞이했다. 그의 얼굴에서 걱정과 불만이 보였다.
윤지현은 그를 덤덤히 바라보다가 신발을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허리를 숙이자마자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게 되었다.
심은우가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
“만지지 마!”
윤지현은 더러운 것이 닿기라도 한 듯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움직인 탓에 또 한 번 통증이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심은우의 손을 피하려고 했다.
심은우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손을 거두어들인 그는 윤지현을 따라서 방 안으로 들어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내 사무실에 CCTV를 설치했어. 앞으로는 넌 언제든 내 사무실을 볼 수 있어 오늘 같은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윤지현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예전처럼 그냥 대충 넘어갈 줄 알았는데 말이다. 윤지현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오늘처럼 갑자기 쳐들어가서 네 캔디가 망신당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
심은우는 말문이 막혔다.
“나랑 구서희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그래. 인정할게. 난 서희가 재밌고 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게 서희는 그냥 여동생일 뿐이야. 오늘 서희가 회사에 온 건 아버지 부탁 때문이었어. 아버지가 내게 서희를 좀 가르쳐 주라고 했었거든. 우리 다음 주면 안승 그룹과 계약할 거야. 구씨 가문에서 사소한 부탁을 한 것뿐인데 당연히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
얼마나 좋은 핑계인가?
구서희는 여동생일 뿐이라고, 회사 이익 때문에 그런 거라고, 심은우는 핑계를 대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구서희의 만행을 용인해 주고 그녀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다. 심지어 그는 아내를 다치게 했다.
심은우는 어쩌다가 뻔뻔한 거짓말쟁이가 된 걸까?
윤지현은 속으로는 그를 경멸하면서 심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녀는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래? 정말 그냥 여동생일 뿐이라고? 그런데 구서희가 그랬잖아. 몇 번이나 함께 밤을 보냈다고 말이야. 오빠랑 여동생이 잠자리를 가지는 건 근친상간 아니야?”
“내가 얘기했잖아. 서희는 제멋대로인 아이라고. 철이 없어서 헛소리를 많이 해.”
“그렇게 헛소리를 해대도 귀여워 보인다는 거지?”
“...”
심은우는 당연히 구서희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어쨌든 나는 서희랑 아무 사이 아니야. 너 여행 가서 돌아오면 우리 아이를 갖자. 앞으로 너는 편안하게 심씨 가문 사모님으로 살아. 약속할게. 심씨 가문 사모님 자리는 영원히 네 거야.”
윤지현은 그를 바라보면서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심씨 가문 사모님은 영원히 그녀일 거라는 건, 앞으로도 쭉 점점 방탕해지는 심은우의 행실을 눈감아줘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녀가 왜 심은우의 소원을 이뤄줘야 한단 말인가?
심은우는 자극을 좇아 바람을 피웠고 구서희와 함께 여행을 가고, 잠을 자고, 일출을 보았다. 심은우는 윤지현의 마음을 난도질해 놓고는 윤지현이 넝마가 된 마음을 끌어안은 채 그를 위해 아이를 낳고 평생 그와 함께 살아주기를 바랐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한 남자인가?
“여보, 사랑해.”
심은우는 윤지현이 미소를 짓자 오늘 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는 윤지현이 거절할 수 없도록 그녀를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마치 정말로 그녀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처럼 아주 다정하게 안았다.
윤지현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
그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질수록 그를 떠나려는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
심은우는 윤지현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의사를 불러 윤지현의 허리를 검진하게 했고 뼈는 다치지 않았다는 걸 알고서 안도했다.
윤지현이 욕실로 들어가자 심은우도 따라 들어가려고 했다.
“내가 도와줄게.”
“됐어.”
만약 다른 여자를 만졌던 손으로 그녀를 만진다면 정말로 그가 마시는 커피에 독을 탈지도 몰랐다.
심은우는 윤지현이 여전히 그와 거리를 두자 불쾌했지만, 오늘은 더 이상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난 밖에 있을게. 필요하면 불러.”
“응.”
윤지현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아파서 죽을 것 같아도 부르지 않을 거니까.’
윤지현이 파자마를 입고 나왔을 때 심은우는 여전히 문밖에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 풍기는 향기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금방 샤워를 마친 윤지현은 피부가 살짝 붉었다.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어깨와 쇄골, 그리고 가녀린 허리에 심은우는 갑자기 몸이 달아올랐다.
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침대로 걸어가서 잘 준비를 하던 윤지현은 그의 눈빛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나 허리 아파. 아쉽지만 오늘 밤은 만족시켜 줄 수 없게 됐어.”
심은우는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 피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살살 할게.”
“나 피곤하고 아파. 그럴 기분 아니라고!”
“...”
심은우는 윤지현이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자 조금 답답했다. 그러나 강제로 할 수도 없었다.
심은우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만 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윤지현은 이튿날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사적으로 기획팀 부하에게 연락해 밥을 사주었고 그들에게 곧 일을 그만둘 거라는 사실을 알렸다.
다들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회사 사람들은 윤지현이 심은우의 여자 친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에 어떤 이들은 윤지현이 남자를 꼬셔서 승진했다고 생각했지만 윤지현은 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따냈다. 그녀는 관리 면에서도 기술 면에서도 뛰어났다. 지난 몇 년간 윤지현은 회사 대표인 심은우보다 더 회사에 진심이었고 매번 프로젝트를 따낼 때마다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그래서 다들 그녀가 심은우와 결혼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윤지현이 일을 그만두다니...
“미안해요.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더는 세민 그룹에 있을 수 없게 됐어요. 다들 앞으로도 노력해야 해요.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해요. 일 얘기 아니더라도 가끔 그냥 얼굴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요.”
윤지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사람들과 건배를 했다.
기획3팀의 팀장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윤지현과 가장 오랫동안 일했고 그만큼 그녀와 사이가 좋았다.
윤지현이 떠난다는 것은 기획팀의 기둥 같은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다들 윤지현을 이해했다. 심은우는 구씨 가문의 여자를 회사로 데려왔고, 며칠 전 윤지현은 두 사람이 사무실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걸 직접 보았다. 얘기를 들어 보니 구서희는 옷도 입고 있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심은우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다들 슬퍼했다.
사람들은 윤지현에게 앞으로 뭘 할 생각이냐고 물었고 윤지현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누군가 추천했다.
“윤 과장님, 구일 그룹은 어때요?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가인 헤일에서 돌아온 분이 지금 인재들을 모집하고 있대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아직 마음에 드는 비서를 채용하지 못한 것 같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