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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부자가 같이 찾아왔다

이강은 원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프러포즈의 실패를 막고 싶었다. 점심, 그 곰곰이 생각한 뒤 부모님에게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을 모시고 오라고 부탁했다. 어르신부터 아이까지, 10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이강의 부모님을 이씨 집안의 대문을 여는 순간 원아는 그만 충격을 받고 말았다... 이연도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방을 꽉 채운 친척들을 바라보았다. “왔네, 왔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강의 둘째 고모였다. 사진 속 여자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걸 보자 그녀는 바로 할머님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강이 여자친구 원아가 왔어요! 정말 미인이에요. 엄마, 빨리 와서 봐봐......” 원아는 놀라움에 입을 닫지 못했다. “들어와.” 이강은 자상한 눈빛으로 원아를 바라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예의는 차려야 했다. 원아는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유지하며 이강의 친척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강의 할머니는 줄곧 원아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할머님은 그녀의 손을 소중히 잡으며 말할 때마다 그녀의 손을 툭툭 쳤다. 좋다고 말할 수도 그렇다고 안 좋다고 말할 수도 없는 예감이 원아의 머리를 스쳐지나 갔다. 그녀는 눈으로 이강의 모습을 찾았고 그가 베란다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긴장해 있는 모습이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대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설날에도 이렇게 푸짐하게 먹은 적이 없는데...” 이연이 입을 열었다. 메인테이블에는 이강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그의 부모님이 앉아있었다. 이강과 원아도 자리에 착석했다. 다른 사람은 다른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그들은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았다 밥을 거의 다 먹은 원아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려 했다. 막 내려놓으려는 그때, 갑자기 이강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따라와 봐.” 그렇게 두 사람은 작은 방에 들어갔다. 이강의 방. “무슨 일인데?” 원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나른했다. 마치 아침과 점심 사이에 존재하는 햇빛처럼 포근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이강의 시선은 무척이나 강인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사과할 게 있어서. 아침의 일은 내가 잘못했어.” “괜찮아. 마음에 두지도 않았어.” 원아가 대답했다. “고마워. 겁에 질린 모습도 이해해 줘서.” 이강은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는 눈을 감더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알아? 난 너를 잃게 되는 게 너무 두려워.” 원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오래전부터 너한테 푹 빠져 있었어. 처음 네가 집에 놀러 왔을 때부터. 그때의 너는 고작 고1이었지... 너무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하고 있는 게, 난 너무 죄책감이 들었어. 다른 여자를 좋아해 보려고 시도도 했었지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어. 그냥 짜증만 났어. 다시 생각해 보니, 넌 언젠가 성인 될 거더라고. 나는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됐어.” “결국 넌 성인이 되었고, 우린 함께 해외로 유학 갈 수 있게 되었어. 네가 겪었던 나쁜 과거를 나한테 남김없이 털어놓았을 때, 사실… 나 엄청 충격 받았어...” 그말을 듣자, 원아의 몸이 제멋대로 떨리기 시작했다. 통제가 되지 않았다. 역시나, 이강은 그 일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 “끝까지 들어.” 이강은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네가 더 이상 깨끗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혼자 자책하고 있는 거야. 처음부터 너의 인생에 들어서지 못 한 내 자신이 너무 미워. 너의 인생을 평온하게 행복하게 지켜주지 못한 내 자신이 미웠어.” “원아, 이건 꼭 알고 있어야 해.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빨리, 더 굳건히 널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녀를 잃게 되는 게 진짜로 무서웠던 건지, 이강은 맨 처음 떨리던 목소리에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변해버렸다.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의 말이 원아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하느님은 아직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드디어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고 아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원아는 과거의 일들을 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과거에 권력과 힘이 있는 그 신비로운 남자가 바라던 거겠지. 여 집사가 그녀에게 한 말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남은 여생 편안하기를 빕니다.” 그 일이 일어난 후, 원아는 생각에 빠졌다. 이런 일을 겪고도 내 남은 여생이 편안할 수 있을까? 어떻게 편안할 수가 있지? 하지만 그건 그녀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기에 후회는 없다. 여생 편안하다면 너무나 큰 행운이겠지만, 그러지 못 한다고 해도 누구를 탓할 수는 없다. 원아가 생각하는 편안함은 사치를 부리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는 게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서로 가치관이 맞는 사람과 서로 배려를 하며 잔잔하게 늙어가길 바라고 있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이강 일 것이다. 원아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더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불안해하지 마. 이러면 내가 미안하잖아. 난 훌륭한 사람이 아니야. 다른 남자가 나한테 관심 가질 일은 없어.” 이강은 갑자기 그녀에게 배달 된 꽃다발이 생각났다. 비행기를 타고 온 그 꽃. “있다고 해도 내가 단단히 마음 붙잡고 있을게.”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이강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원아는 소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강이 원아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녀를 거실 중앙에 멈추게 했다. “뭐 하는 거야?” 원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눈빛으로 수상한 표정을 짓는 이강에게 물었다. 그때, 수많은 친척 어르신들을 앞에서, 이강은 바지 주머니에서 벨벳 재질의 검은색 반지 케이스를 그녀 쪽으로 열었다. ”와, 이렇게 갑자기?!” 이연은 입을 막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지 친척을 엄청 많이 부르더라. 프러포즈하려고 그랬구나! 이강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진중하게 말했다. “나한테 시집와라, 원아야. 나의 가족이 되어줘.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이 되어줘.” “......” 프러포즈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결혼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른 받아줘!” 원아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강의 엄마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연은 원아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강과 고백을 받아주는 그날부터 원아는 알고 있었다. 예외가 없는 한 이강과 결혼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 그녀는 이강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저녁 9시까지 얘기를 나누고서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강은 차를 몰아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원아는 차에서 내렸다. “여기까지 바래다주면 돼. 나 혼자 좀 걷고 싶어.”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녀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알았어. 그럼 일찍 쉬어.” 이강은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원아는 그가 아우디 Q5를 몰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네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어서 어둡지는 않았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아직 동네를 거닐고 있었다. 원아는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열쇠를 찾으려 가방에 손을 뻗었다. 그때 말랑거리는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아이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차 있었다. “원아 아줌마!”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쳐다보았다. 원아는 제자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 엄숙하게 서 있는 어른과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문소남의 입체적인 이목구비는 어두운 조명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시선에 엄청난 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금방이라고 터질 것 같았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며 불쌍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H 시 호텔에서 만났을 때의 그 오만한 태도가 아니었다. 아이는 아빠와 원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녀는 그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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