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김소정은 정지헌에게 들린 채로 베리 클럽에서 나오게 되었다.
홀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다은은 정지헌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우리 소정이 놔줘요!”
“음?”
정지헌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다은은 그 순간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정지헌이라니.
그녀는 서둘러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네요.”
김소정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러나는 강다은을 바라보았다. 친구를 위해서 한 번 용기를 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정지헌은 조금 과격하게 김소정을 차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김소정은 허리를 곧추세운 뒤 용감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그를 바라보았다.
“정지헌 씨, 자중하세요. 전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런 태도로 저를 대하는 거죠?”
“자중하라고?”
정지헌은 비웃었다.
“네 입에서 자중하라는 말이 나오다니, 우습네.”
정지헌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남자가 좋아? 그래. 우리 삼촌이랑 이혼하면 남자 몇 명 데려와서 널 만족시켜 줄게. 그러면 돼?”
김소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지헌은 갑자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날 선 어투로 경고했다.
“하지만 넌 지금 우리 정씨 일가로 시집와서 우리 삼촌을 위해 액막이 노릇을 하는 거니까 네 본분을 잊지 마. 다시 한번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
말을 마친 뒤 그는 뒷좌석에서 나와서 앞좌석에 앉았다.
“시동 걸어. 그리고 뒷좌석 시트 전부 새 걸로 바꿔.”
“네, 대표님.”
정지헌은 김소정을 향한 혐오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김소정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지헌이 그날 밤 그와 함께 있은 여자가 그녀라는 걸 안다면 본인 피부를 한 겹 벗겨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김소정은 가는 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한 호화로운 별장 앞에 멈춰서고 나서야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긴 어디예요? 왜 이곳으로 절 데려온 거예요?”
정지헌은 담배를 끈 뒤 양지민을 향해 말했다.
“김소정 데리고 와. 할머니 놀라시지 않게 뒷마당으로.”
김소정은 3층의 어느 방에 도착하게 되었다.
방 안 조명은 어둑어둑했고 분위기도 아주 어두웠다.
침대 위를 보니 살짝 불룩했다. 자세히 보니 온몸에 튜브를 꽂고 있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무릎 꿇어!”
갑자기 누군가 김소정의 다리를 걷어찼고, 김소정은 비참한 꼴로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정지헌은 천천히 다가가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삼촌이야. 네 아버지 때문에 식물인간이 되셨지. 네 아버지가 죽었으니 딸인 네가 대신 속죄해야지.”
김소정은 고개를 들어 정지헌을 바라보면서 고집스럽고도 자신 있게 말했다.
“전 우리 아버지가 결백하다는 걸 꼭 증명할 거예요.”
정지헌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사실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사람이야. 넌 이곳에 계속 무릎 꿇고 있어. 우리 삼촌이 깨어날 때까지!”
문이 쾅 닫히자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김소정은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결백했고 죄가 없었기에 무릎을 꿇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김소정은 침대 곁으로 걸어가서 조용히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지헌의 삼촌은 은 정지헌과 나이가 엇비슷해 보였다.
이목구비를 보니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는지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또 굉장히 수척했다.
김소정은 예전에 정형외과 전공이었고 의학적으로 재능이 넘쳤다.
그녀는 졸업한 뒤 의료계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일 때문에 중도에 건축학을 배우게 되었다.
김소정은 한숨을 쉰 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남자의 손발을 주물러 주며 그의 근육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얼른 일어나요. 당신이 깨어나야 저도 자유로워질 수 있거든요.”
다음 날.
정씨 일가 사람들이 식탁 앞에 모여 아침을 먹었다.
이선화는 기사를 보던 정지헌을 힐끗 보다가 한참 뒤 집사에게 말했다.
“소정이는 이제 우리 정씨 일가의 일원이니까 지금 바로 사람을 시켜 데려와. 그리고 도우미를 시켜 소정이가 쓸 생필품 좀 마련해줘.”
“네, 어르신.”
“필요 없어요.”
집사가 움직이려는데 정지헌이 갑자기 느긋하게 말했다.
“어젯밤에 이미 데려왔어요.”
이선화는 눈을 빛내면서 정지헌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서둘러 말했다.
“지금 어디 있어? 얼른 와서 밥 먹으라고 해.”
“삼촌 방에서 무릎 꿇고 있어요.”
“뭐라고?”
이선화는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무릎을 꿇게 할 수가 있어? 너 정말 이럴래?”
이선화는 속 터진다는 표정으로 정지헌을 손가락질했다.
“집사, 어서, 어서 소정이를 데려와.”
김소정은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정지헌의 매서우면서도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정지헌은 김소정을 매우 싫어했기에 김소정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뱀처럼 음산했다. 김소정은 그의 눈빛에 불안해지면서 겁이 났다.
그녀는 시선을 내려뜨리면서 일부러 침착한 척했다.
“소정아, 어서 이리로 와서 앉아.”
김소정은 그 순간 긴장이 살짝 풀렸다.
“난 지헌이 할머니다. 앞으로는 지헌이처럼 그냥 할머니라고 편하게 부르면 돼.”
“어머님, 호칭이 틀린 거 아닌가요?”
옆에 있던 장수미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소정이는 준우 씨 아내니까 어머님이라고 불러야죠.”
“입 다물어!”
장수미는 호칭을 고치는 것으로 이선화의 호감을 사려고 했는데 오히려 혼나게 되자 못마땅해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선화는 서둘러 정지헌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지헌아. 내가 너한테 얘기했던 애가 얘야. 얘는 내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어. 날 구해준 은인이란다.”
정지헌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여전히 김소정에게 아무런 호감이 없었다.
김소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파묻은 채로 밥을 먹었다.
장아진은 경멸에 찬 눈길로 김소정을 바라보며 비아냥댔다.
“지금 입고 있는 옷 바 직원들이 입는 유니폼이죠? 정말 잘 어울리네요.”
김소정은 시선을 들더니 그녀를 향해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단번에 이게 바 유니폼이라는 걸 알아보시다니 안목이 참 높으시네요.”
그 말은 바에 많이 가봤냐는 뜻이었다.
장아진은 김소정의 대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가족들이 있어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장수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김소정을 훑어봤다. 김소정은 의외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정지헌을 바라보았다.
“지헌아, 네 삼촌도 결혼했잖니? 너도 네 삼촌이랑 나이가 비슷한데 이젠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 우리 아진이를 봐...”
“숙모께서 제 결혼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전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번 달에 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에요.”
장수미는 펄쩍 뛰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그게 누군데?”
“신씨 집안의 딸 신지수 씨요.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은 데다가 다정하며 정숙하죠. 이상적인 결혼 상대예요.”
김소정은 덤덤하게 아침을 먹었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너무 고팠다.
이선화는 김소정을 바라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정지헌에게 말했다.
“중혼하고 싶은 거라면 걔랑 결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