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어머, 사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얼른 일어나요.”
이선화는 서둘러 주여정을 부축했다.
주여정은 죽어도 일어나려고 하지 않으며 이선화에게 말했다.
“어르신, 제 딸이 지헌 도련님과 결혼한 줄은 몰랐습니다. 못난 제 딸이 어떻게 지헌 도련님과 결혼한단 말입니까? 저희가 그날 사인했던 계약서는 파기해 주세요.”
“쯧, 엄마도 저렇게 무시하다니 정말 불쌍하네.”
장수미는 김소정을 조롱했다가 이선화의 따가운 눈길을 받았다.
이선화는 김소정을 바라보며 그녀의 뜻을 물었다.
김소정은 복부 쪽 옷을 꽉 쥐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할머니, 계약 그냥 파기해 주세요. 전 정지헌 씨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정지헌은 자세를 바로 하면서 테이블 위 차를 마셨다.
그는 냉담한 눈빛을 하면서 김소정을 조롱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아뇨. 지헌 도련님, 소정이는 지헌 도련님과 어울리지 않아요. 지수 아가씨처럼 완벽한 여자야말로 지헌 도련님에게 어울리죠. 소정이가 뭐가 잘난 게 있습니까? 소정이는 그냥 한없이 평범한 아이일 뿐이에요.”
이선화는 불쾌한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난 소정이가 신지수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사돈, 혹시 지헌이가 소정이를 괴롭힐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정씨 일가는 은혜와 원수를 확실히 하는 집안이거든요. 소정이 아버지가 저지른 실수를 소정이 탓으로 돌릴 일은 없습니다.”
이선화의 말에 김소정은 울컥했다. 갑자기 눈가 뜨거워져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김소정은 이선화와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그녀를 매우 아껴주었다. 그러나 정작 엄마라는 사람은...
이 순간 김소정의 마음은 늦가을의 비보다 더욱 차갑게 식었다.
이선화가 계약을 파기하려고 하지 않자 주여정은 막 나갔다.
“소정이는 정말로 지헌 도련님과 어울리지 않아요. 소정이는 사생활이 혼란스럽고 문란해서...”
“엄마!”
김소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여정의 말허리를 잘랐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장수미와 장아진은 깜짝 놀라더니 이내 경멸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수미는 이선화를 향해 말했다.
“어머님, 어머님이 지헌이를 위해 찾아주신 손주며느리가 사생활이 혼란스러운 사람이래요. 앞으로 소정이 배가 불러오면 정씨 일가 핏줄이 맞는지 아닌지부터 확인해야겠어요.”
김소정은 저도 모르게 창백해진 얼굴로 복부를 쓸었다.
이선화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정지헌은 시선을 내려뜨리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의 웃음은 그토록 냉정하고 차가웠으며 조롱이 가득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김소정은 허리를 숙이고 주여정을 일으키려고 했다.
정지헌은 김소정의 앞으로 걸어가서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빨개진 코끝과 눈을 바라보았다.
정지헌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천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네가 우리 정씨 일가의 손주며느리라는 건 잊지 마. 만약 3년 동안 감히 다른 남자와 놀아난다면 죽을 만큼 괴롭혀줄 테니까! 비록 난 네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내 체면은 중요해서 말이야.”
말을 마친 뒤 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그녀 앞에 던졌다.
“오늘 이렇게 소란을 벌이는 것도 결국은 돈 때문 아냐? 하긴, 3년은 별로 길지 않으니까 최대한 많이 건지고 싶겠지. 이건 10억이야. 카드 챙기고 꺼져. 우리 집안 사람들 눈 더럽히지 말고.”
정지헌은 도도하게 말했다.
김소정은 마치 오물 속에 파묻힌 쓰레기처럼 비참하고 더럽혀진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카드를 주워 정지헌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주여정이 갑자기 카드를 빼앗았다.
“10억이 다 뭐라고. 정씨 집안에 돈이 많을 텐데 겨우 10억으로 우리 모녀를 상대하려고요? 계약 파기하지 않으면 난 매일 이곳에 와서 소란을 일으킬 거예요.”
이선화는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지끈거려 집사를 향해 외쳤다.
“이 미친 여자를 당장 내쫓아!”
주여정은 곧 도우미들에게 끌려가서 내쫓겼다.
김소정은 입술을 깨물면서 절뚝거리며 그녀를 따라갔다.
그런데 이선화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소정아, 할머니는 계약 파기할 생각 없다. 난 네 인품을 믿어. 그러니까 우리 3년만 기다려보자.”
이선화는 아주 자애로웠고 그녀를 굳게 믿어주었다.
김소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정지헌을 보지 않고 이선화를 향해 울먹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무릎과 복부의 통증을 참으며 비참하게 밖으로 나갔다.
정지헌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절뚝거리는 김소정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뒤 짜증 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김소정은 더러운 오물이니 조금이라도 더 보면 두 눈마저 더러워질 것 같았다.
김소정은 주여정을 따라잡은 뒤 그녀에게서 카드를 빼앗았다.
주여정은 초조해하면서 화를 냈다.
“계약 파기도 못했는데 돈도 못 받게 해?”
“엄마!”
김소정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실망했다.
“우리 집안 존엄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요?”
“흥, 존엄?”
주여정은 일그러진 얼굴로 비아냥댔다.
“네 존엄 따위가 지수 아가씨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
김소정은 이를 꽉 깨물며 빨개진 눈으로 주여정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아버지가 주여정이 그녀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을 뻔했으니 꼭 효도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김소정은 그녀가 자신의 친엄마가 맞는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저녁이 되자 김소정은 정씨 일가로 돌아가지 않고 강다은의 집에 있었다.
그런데 이선화가 사람을 시켜 김소정을 데리러 왔다.
돌아가 보니 정지헌은 집에 없었다.
김소정은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주여정은 그녀에게서 카드를 빼앗지 못하자 그녀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야 떠났다.
비록 김소정은 정지헌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앞에서 존엄을 챙기고 싶었다.
서재 앞에 서 있던 그녀는 한참 뒤에야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김소정은 정지헌의 허락 없이는 그의 서재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의 물건에 마음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카드 한 장만 놓고 나올 생각이었다.
김소정은 카드를 책상 위 눈에 띄는 자리에 놓은 뒤 나오는 길에 정지헌과 마주쳤다.
정지헌은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운 그의 모습은 금욕적이면서도 위험해 보였다.
김소정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정지헌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내 서재에는 왜 들어간 거야?”
김소정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인 뒤 그를 지나쳐 안방 쪽으로 걸어갔다.
정지헌은 미간을 구겼다.
감히 그를 무시하다니.
책상 앞에 앉은 정지헌은 단번에 카드를 발견했다.
그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면서 사색에 잠기 얼굴로 긴 손가락으로 카드를 건드렸다.
김소정은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얇은 이불을 꽉 쥔 채 온몸을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방문이 열렸고 곧이어 키 큰 사람이 들어왔다.
정지헌이었다.
김소정은 짜증 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김소정은 자신을 싫어하는 정지헌이 그녀가 방에 있는 한 그 방으로 절대 들어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지헌은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바람에 김소정은 자유를 잃었다.
정지헌은 그녀의 곁에 멈춰 섰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김소정은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어둠 속에서도 김소정은 정지헌이 내뿜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정지헌은 한참 뒤에야 그곳을 떠나 욕실로 향했다.
그는 줄곧 전등을 켜지 않았다. 잠시 물소리가 들렸고 정지헌은 곧 욕실에서 나온 뒤 곧장 침대로 향했다.
김소정은 춥고 긴장돼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지헌의 호흡이 균일해지는 걸 들은 김소정은 그가 덮은 이불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할지를 떠올리다가 울컥했다.
이렇게 3년을, 1000일이 넘는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김소정은 그냥 당장 죽고 싶었다.
그러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평평한 복부를 만졌다.
김소정의 마음속에 희망이 차올랐다.
어쩌면 이 아이가 이 숨 막히는 결혼 생활을 끝내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러나 김소정은 곧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정지헌은 난폭하고 무자비한 사람이기에 만약 이 아이의 존재를 안다면 틀림없이 아이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김소정은 입술을 깨물며 아이를 지워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아침이 되었고 김소정은 알람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떴다가 창문 앞에서 옷을 입는 정지헌을 보았다.
그는 옷걸이가 좋고 몸도 건장하고 훤칠했다.
햇빛이 그의 몸에 드리워지자 살기가 조금 줄어들고 분위기가 살짝 부드러워진 듯하여 김소정은 저도 모르게 그를 잠깐 바라보았다.
“좋아요. 오늘 시간 돼요. 잠시 뒤에 만나요.”
남자는 전화에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신지수와의 통화일 것이다.
정지헌은 갑자기 옷을 다 입은 뒤 김소정 쪽으로 걸어갔다.
김소정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는데 그 순간 남자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