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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욕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정지헌은 김소정의 나체와 그녀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자 화가 났다. 그는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옷 입고 나와.” 김소정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대충 가운을 걸치고 나갔는데 나가자마자 정지헌이 그녀의 목을 힘껏 졸랐다. 몸도 그에게 밀쳐져 벽에 닿았다. “누가 들어오래?” 정지헌은 마치 화가 난 사자처럼 위험하면서도 악랄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 허락 없이는 내 방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얘기해준 사람이 없었던 거야?” 김소정은 입술을 떨었다. 두려움 때문에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가운이 흘러내리자 그녀의 어깨와 가슴팍에 남은 그날 밤의 흔적이 드러났다. 정지헌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혐오스러운 눈빛을 해 보였다. 그는 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인 뒤 고함을 질렀다. “당장 꺼져!” 김소정은 감히 그곳에 있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밖에서는 어느샌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가을비에 김소정은 마음마저 차게 식었다. 그녀는 두 팔을 꼭 껴안은 채로 망연하게 마당에 서 있었다. 그녀는 눈시울이 빨개졌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고,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소정아... 소정아...” 사정을 전해 들은 이선화가 부랴부랴 달려와서 김소정을 잡았다. “왜 밖에서 비를 맞고 있어? 혹시 지헌이가 널 괴롭혔니? 이 빌어먹을 놈, 내가 혼내주마.” 김소정은 그녀를 붙잡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할머니, 왜 그곳이 지헌 씨 방이라는 걸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만약 알았더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선화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희는 결혼했으니 당연히 같이 살아야지. 그런데 지헌이 걔가 여자를 이렇게 심하게 대할 줄은 몰랐다. 울지 마. 할머니가 혼내줄게.” “흥, 너 정말 능력이 좋네. 지헌이가 여자에게 폭력까지 쓰게 만들고 말이야.” 장수미가 기회를 틈타 비아냥댔다. 이선화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그 입 다물어.” 이선화는 김소정을 데리고 정지헌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무서워하지 마. 할머니가 있잖니? 지헌이가 다시는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 김소정은 필사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다. 그녀는 정지헌이 무서웠고 단 한 순간도 그와 같은 방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소정이 진심으로 싫어하자 이선화는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이제 막 결혼했어. 앞으로 오랫동안 얼굴 마주 보고 살 텐데 계속 그렇게 지낼 거야?” 오랫동안 마주 보고 살아야 한다는 말에 김소정은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안방에서 정지헌은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은지 미간을 한껏 구기고 있었다. 그는 의자 손잡이에 손을 올렸는데 손가락이 길고 마디마디가 분명하여 아주 예뻤다. 그의 이목구비는 뚜렷했으며 턱선은 완벽했고 어느 각도에서 봐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준수했다. 검은색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서 쇄골이 살짝 보였다. 게다가 정지헌은 다리가 아주 길었고 비율도 거의 완벽했다. 몸매가 좋다는 건 그날 밤 이미 알았다. 사실 성격을 제외하면 정지헌은 여자들에게 참 인기가 많을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격파탄자라서 잘생긴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김소정은 방문 앞에 서서 한 발짝도 내딛지 않으려고 했다. 이선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안으로 들어갔는데 정지헌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꺼져!” 이선화의 안색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누굴 죽이려고? 매일 일만 열면 누굴 죽이겠대. 너 세상이랑 원수졌니?” 정지헌은 미간을 구기며 의자에 바로 앉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선화가 아닌 김소정을 노려보았다. “할머니를 불러오면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거로 생각한 거야?” 조금 전 사람을 죽일 듯하던 그의 눈빛을 떠올린 김소정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선화는 그 모습을 보고 복장이 터졌다. “너 소정이 계속 괴롭히면 평생 이혼하지 못할 줄 알아!” 정지헌은 코웃음을 쳤다. “그 서류가 있으면 어차피 전 평생 이혼하지 못할 텐데요.” 이선화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3년. 만약 3년간 너희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없다면 그 서류를 파기할게. 그때가 되면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 김소정은 마치 희망을 본 듯 눈을 빛냈다. 똑똑한 정지헌은 곧바로 물었다. “조건이 뭐예요?” “두 번 다시 소정이를 방에서 내쫓지 않고 소정이를 괴롭히지 않는 거.” 정지헌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선화는 코웃음을 쳤다. “못 하겠으면 3년이란 기한은 없는 거야.” 이선화는 최대한 양보했다. 오래 보면 없던 정도 생긴다고, 그녀는 3년 사이 김소정과 정지헌이 틀림없이 서로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이선화가 떠난 뒤에도 김소정은 마치 목석처럼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정지헌은 소매를 정리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부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서 할머니가 내가 널 쫓아냈다고 생각하게 하려고? 그래야 3년이란 기한을 없앨 수 있고 정씨 일가 며느리 자리를 꿰찰 수 있어서 그래?” 김소정은 화가 나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세상에 말을 이렇게 열받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김소정은 평생 정지헌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 정지헌이 갑자기 일어나서 다가왔다. 그는 김소정의 앞에 서더니 일부러 그녀의 얼굴에 대고 연기를 내뱉었다. 정지헌은 그녀가 입고 있는 가운을 보며 말했다. “무슨 속셈인지 알아. 하지만 괜히 힘 빼지 마. 난 평생 네게 손댈 생각 없으니까. 왜냐면... 너무 더러우니까!” 김소정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문득 그날 밤의 과격했던 정지헌을 떠올렸다. 그날 밤 그의 모습과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엄청난 대조가 되었다. 그녀가 더럽다니. 김소정은 소리 내어 크게 그를 비웃어주고 싶었다. 그날 밤 그는 그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잤다고. 그러면 정지헌이 화를 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지헌의 악랄함을 생각해 봤을 때 만약 그런 얘기를 한다면 김소정은 아마 죽을지도 몰랐다. 정지헌의 싸늘한 시선 아래 김소정은 미친 생각을 접었다. 그녀는 얌전히 시선을 내려뜨리고 대꾸하지 않았다. 정지헌은 더는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경고했다. “내 침대에 올라오지 마. 알아서 자리 잡고 자.” 그렇게 말한 뒤 그는 그녀를 지나쳐서 나갔다. 김소정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방 안을 쭉 둘러보았다가 침대 옆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옷장 안에서 얇은 이불 두 개를 꺼내서 하나는 바닥에 깔고 다른 하나는 덮었다. 비록 날이 춥긴 했지만 이불이 얇은 이불 두 개밖에 없었다. 그래도 없느니만 나았다. 김소정은 얇은 이불을 덮고 몸을 말았다. 그녀는 침대 위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이불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3년. 3년만 버티면 되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김소정은 침대 위 이불이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전혀 손대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지헌이 어젯밤 방으로 돌아와서 자지 않은 듯했다. 당장 이혼할 수는 없으니 김소정은 우선 공사장 일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날 현장의 새로 온 사장은 현장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녀와 약속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현장에 가볼 생각이었다. 운이 좋으면 새로 온 사장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본관 쪽, 이선화는 집사에게 함께 아침을 먹게 김소정을 데려오라고 했다. 집사는 김소정이 아침 일찍 외출했다고 말했다. 이선화는 본능적으로 정지헌을 바라보았고 정지헌은 느긋하게 우유를 마시면서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절 보세요? 제가 아침을 먹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요.” 이선화는 코웃음을 쳤다. “내일부터 소정이랑 같이 아침 먹어. 소정이가 오지 않으면 너도 먹지 마.” 정지헌은 미간을 구기며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이선화를 향해 강조했다. “전 할머니 친손자예요.” “소정이는 내 손주며느리야.” 정지헌은 티슈를 식탁 앞에 던지며 웃는 얼굴로 이선화에게 말했다. “제가 소정이를 사라지게 하겠다면요?” 이선화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소정이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진다면 신씨 일가 딸도 사라지게 될 거다.” 정지헌은 싱긋 웃었다. “할머니, 전 할머니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 “미안해요. 우리는 여자 직원은 뽑지 않아서요.” 김소정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 직원을 바라보며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공사장에서 그녀를 고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럴수록 이 공사장에 문제가 있다는 게 확실했다. 공사장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 새로 온 사장을 공략해야 할 듯싶었다. 그 사장은 그녀와 약속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롤스로이스 한 대가 그곳으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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