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신수아가 몸을 홱 돌리자 주강빈이 정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가 황급히 전화를 끊던 순간, 주강빈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다시 한번 물었다.
“누가 이민하냐고?”
신수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는 친구가 이민하기 전에 함께 모이자고 하네.”
그녀가 워낙 차분하게 말했던 탓인지 주강빈도 거짓말일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꼭 안고서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또 너인 줄 알았잖아. 깜짝 놀랐어.”
신수아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고작 이민 갖고 뭘 이렇게 오버야?”
주강빈은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 그는 속절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은 가족 3대가 군인 출신이라 출국이 쉽지 않아.”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여전히 마음이 안 놓이는지 재차 당부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으면 때리고 욕하고... 날 죽여도 좋으니 이민은 절대 하지 마. 그럼 널 영원히 찾아갈 수가 없잖아.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그의 품에 꼭 안긴 신수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던지 그 뒤로 며칠 동안 주강빈은 줄곧 신수아의 옆에서 반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절친이 클럽을 오픈했다면서 다 함께 모여서 놀자고 해도 그녀를 데리고 나갈 지경이었다.
이토록 감시를 당하니 신수아는 마침 출입국 사무소에 서명하러 가지도 못할 겸 그와 함께 클럽으로 나섰다.
룸에 들어서자마자 한 무리 남자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형수님, 오늘은 마음껏 놀아요. 형수님이 조용한 걸 좋아한다고 해서 노래도 죄다 피아노곡으로 바꿨고 오늘 하루는 손님들도 안 받으려고요.”
“그래요, 형수님. 여기 디저트도 마련해놨어요. 강빈이가 이것들 전부 형수님이 좋아하는 디저트라고 했거든요.”
“얼른 와서 앉아요. 과일도 다 깎아놨어요.”
...
주강빈은 그런 친구들을 보더니 눈썹을 치켰다.
“자식들 언제 이렇게 철들었어?”
“네가 팔불출인 거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어? 형수님께 잘 보여야 너한테도 점수 따는 거잖아.”
“그러게 말이야. 너 형수님 만난 뒤로 우린 뒷전이더라. 하는 수 없지. 너랑 함께 형수님 높이 받드는 수밖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 앙증맞은 체구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차유리였다.
매니저가 얼른 그녀를 말렸다.
“죄송해요, 손님. 오늘은 VIP 손님이 오셔서 다른 손님들은 일절 안 받아요.”
차유리는 그를 밀치면서 제멋대로 안에 들어왔다.
“수아 언니! 어? 강빈 오빠도 있었네요? VIP 손님들이 두 분이었어요? 잘 됐다! 나도 끼워줄 수 있죠?”
뭇사람들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가 신수아의 옆에 털썩 앉았다. 이어서 흐릿한 불빛 아래 주강빈의 손을 본인 치마 사이에 쏙 넣었다.
신수아는 몸을 움찔거리며 주강빈을 힐긋 살폈는데 이 남자는 차유리가 나타난 순간 당장이라도 끌어내려고 표정이 굳었지만 치마 사이에 손이 닿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신수아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침착해. 끝까지 모른 척해야 해.’
파티 중에 신수아가 화장실로 나갔다.
그녀는 찬물로 세수하며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겠다고 애를 썼으나 뒤에서 갑자기 도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서운해하지 말고 들어요. 언니는 아직 젊고 예쁜데 왜 좀처럼 꾸미지 않죠? 언제까지 그렇게 보수적으로 살래요?”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 차유리의 시큰둥한 표정이 내비쳤다.
“나 좀 봐요.”
그녀는 코트를 펼치고 농염한 속옷을 훤히 드러냈다.
“남자들은 다 시각적인 동물이라 본능에 충실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 내기할래요? 이따가 내가 이런 속옷 차림이라고 말하면 강빈 오빠가 계속 언니랑 함께할까요? 아니면... 참지 못하고 그냥 여기서 나랑 섹스할까요?”
신수아는 몸을 파르르 떨다가 아무 말 없이 손의 물기를 털어내고 룸에 들어갔다.
잠시 후 차유리도 안으로 들어왔다.
주강빈을 스쳐 지나갈 때 그의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는데 문자를 확인한 순간 이 남자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한없이 짙은 눈동자로 변했다.
곧이어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아야, 나 잠깐 통화하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그는 신수아의 대답도 기다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차유리도 핑계를 둘러대고 룸을 나섰다.
사라진 두 사람 앞에서 신수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너덜너덜해졌다.
‘내가 아픈 만큼 주강빈 너도 똑같이 지옥에 갇혀봐야 해. 죽을 만큼 괴로운 게 뭔지 톡톡히 느껴봐야지.’
밤이 서서히 깊어졌지만 오후에 금방이면 돌아온다던 주강빈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친구들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 멀뚱멀뚱 쳐다봤다.
마침내 그중 한 명이 신수아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주강빈에게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겼을 거라며 해명했지만 신수아는 그저 웃길 따름이었다.
차유리 말고 그에게 또 어떤 예기치 못한 사정이 있을까?
다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룸을 나섰다.
차에 탄 신수아는 가방을 못 챙긴 사실이 떠올랐다.
이제 막 룸에 돌아가려고 할 때 안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돌려보냈네! 조금만 더 있어도 바로 들통났을 거야. 강빈이 저 녀석 형수님 앞에서 연기 끝내주지 않냐? 나 진짜 소름 돋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