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업계에서 알다시피 주강 그룹 대표 주강빈은 카리스마 넘치고 매사에 단호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다. 사생활 또한 깔끔하기로 소문이 났다. 모든 여자에게 거리감을 두고 있으니 여태껏 여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이브닝파티에서 신수아를 만났다.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주강빈은 열정적으로 대시했다. 별장, 수입차, 액세서리 등 어마어마한 선물 공세는 물론이고 하루가 멀다 하게 불꽃놀이를 선사하며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단종된 밤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자 폭설도 마다하고 밤새 세 개의 도시를 넘나들며 따끈따끈한 케이크를 떡하니 갖다 바쳤다. 그때의 주강빈은 너무 고생한 나머지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하지만 신수아의 마음을 얻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그녀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날이다.
저 멀리 오성에 있던 주강빈은 수십조 원에 달하는 협력 아이템을 포기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두 눈이 충혈되고 만신창이가 된 채 달려오더니 오히려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았다.
“괜찮아, 수아야, 너에겐 내가 있잖아. 평생 네 곁에 있어 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마.”
신수아는 그윽한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심장이 쿵쾅댔다.
‘그래, 이번 생은 바로 너야.’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다만 온 신경이 그녀뿐이던 이 남자가 3개월 전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집에 머무른 친구 여동생과 바람이 났다.
별장 소파, 주방, 침대 곳곳에 더러운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주강빈은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있을까?
진실을 알게 된 그 순간, 신수아는 슬픔과 절망, 의혹에 푹 빠졌다가 마침내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이 현실을 마주하고 철저히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주씨 일가는 가족 3대가 군인 집안이다 보니 일반인들보다 출국에 제약이 많다.
물론 주강빈도 포함해서 말이다.
신수아가 해외로 나가버리면 주강빈은 아마 평생 그녀를 찾아갈 수가 없다.
그녀는 이민 서류를 챙기고 택시를 잡아서 더원으로 향했다.
주씨 일가 별장에 들어서자 홍가시나무 향이 코를 찔렀다.
한창 벽에 장식품을 달던 두 사람은 인기척 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주강빈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더니 금세 부드러운 눈빛으로 돌변하며 그녀의 손을 다잡았다.
“우리 수아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안 추워? 친구랑 놀러 나간다더니 빨리 돌아왔네? 난 그것도 모르고 서프라이즈 준비 중인데...”
서프라이즈?
신수아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목에 찍힌 키스 마크에 시선이 쏠렸다.
대놓고 찍힌 키스 마크에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가슴을 후벼 파듯이 아팠다.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옆에 있던 차유리가 생긋 웃으면서 다가왔다.
“강빈 오빠 진짜 언니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처음 만났던 기념일까지 성대하게 챙겨주잖아요...”
그녀는 일부러 말끝을 흐리면서 소파에 한가득 쌓인 선물들을 가리켰다.
“저것 봐요. 다 오빠가 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들이에요.”
신수아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소파를 쳐다봤는데 물기로 흥건해진 역겨운 장면을 본 순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방금 집에 들어올 때 코를 찔렀던 향기와 지금 소파의 흔적까지 더하니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이러고도 날 사랑해?’
주강빈의 사랑은 고작 신수아에게 선물 공세나 하면서 차유리와 소파에 드러누워 극락을 즐기는 걸까? 얼마나 도취했으면 소파를 흠뻑 적실 지경이 됐을까?
뼈저리는 고통도 별 것 없었다.
한편 주강빈은 그녀의 수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진작 준비한 목걸이를 걸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자기야, 오늘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야. 우리 자기 위해서 파인다이닝도 준비했어.”
신수아는 떨리는 몸을 겨우 추스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밥은 됐고, 몸이 불편해서 쉬어야겠어.”
이 인간과 함께하는 일분일초가 이제 그녀에게 고통의 연장선이다.
애초에 티 없이 순수한 감정을 원한다고, 먼지 하나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 말해뒀는데 통째로 무시한 사람이 주강빈이다.
차라리 대시나 하지 말 걸, 나 없이 못 산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왜 이제 와서 마음을 저버리는 걸까?
한편 주강빈은 그녀가 몸이 불편하다고 하자 또 오버하기 시작했다.
개인 의사를 잔뜩 불러와서 검진한 후 아무 일 없다고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안 놓여 비서더러 기혈을 보충하는 영양제를 사 오라고 했다. 또한 따뜻한 우유를 건네면서 자상하게 재워주었다.
네댓 시간을 바삐 돌아친 후 신수아가 끝내 잠들었다.
깊은 밤, 목이 말라서 물 마시러 나왔는데 문을 연 순간 그대로 온몸이 굳어버렸다.
옆 방에 문이 활짝 열렸고 은은한 달빛이 드리운 방 안에 벌거벗은 두 사람이 훤히 보였다.
“오늘 그 목걸이 몇백억은 할 텐데, 내가 그렇게 갖고 싶다고 할 땐 꿈쩍도 안 하더니 수아 언니한테는 아낌없이 퍼주네요. 언니가 뭘 해줬다고, 칫!”
한바탕 침대를 뒹군 후 차유리가 두 다리로 그의 몸을 칭칭 감고서 질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에 주강빈이 미간을 구기며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담뱃불을 지폈다.
“주제 파악 못 해? 난 수아만 사랑한다고 얘기했잖아!”
“계속 나랑 관계 유지하려면 지금처럼 몰래 해야 할 거야. 만에 하나 수아한테 들키는 날엔 넌 끝장이라고!”
차유리는 사색이 되어 발가벗은 몸으로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알아요, 언니만 사랑하는 거. 그래도 내가 오빠를 좋아하잖아요. 질투 나는 걸 어떡해요?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잖아요!”
주강빈은 아무 말 없이 서랍에서 똑같은 디자인에 색상만 다른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불쌍한 척하지 마. 네 것도 하나 샀어. 수아 몰래 끼고 다녀! 들키는 날엔 우리 사이도 끝장이야.”
차유리는 화색을 띠며 키스 마크가 가득 찍힌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고마워요, 오빠! 역시 나도 챙길 줄 알았어요! 근데 오빠는 왜 그렇게 수아 언니 떠나갈까 봐 두려워하는 거죠?”
주강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맞아. 난 걔 없으면 안 돼. 수아가 떠나가면 아마 미쳐버릴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는 또다시 차유리를 깔아 눕히고 그녀의 몸을 탐했다.
요란한 동작에 침대가 끽끽거리고 차유리의 신음도 끊이지 않았다. 멀리 서 있는 신수아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는 벽에 걸린 결혼사진 속 주강빈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기다려, 주강빈. 15일 뒤에 널 미쳐버리게 만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