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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이때, 앞에 카키색 덩어리가 스쳐 지나갔고 다름 아닌 쌀쌀맞은 비행사였다. 눈에 뵈는 게 없는 온서우는 머릿속에 오로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여보! 여보, 얼른 살려줘요! 누군가 날 납치하려고 해요.” 온서우는 남자를 향해 목청껏 외쳤다. 정서준은 특수 비행대대 비행사로서 귀와 눈이 유독 밝고 오감이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녀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순간 인파를 헤치고 긴 다리를 움직여 온서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거 놔!” 싸늘한 목소리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안경 남 일당은 군복 차림의 정서준을 보자마자 온서우를 내팽개치고 열차에서 잽싸게 뛰어내렸다. 온서우는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정서준의 품에 쓰러졌다. 그리고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본능적으로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살... 살려주세요. 중독된 것 같아요...”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빨갛고, 목소리는 힘이 전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추태를 보일지 모른다. 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강철처럼 다부진 정서준의 몸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민재야! 범인을 체포하러 가.” 정서준은 객실을 향해 성난 목소리로 외치고 한 손으로 온서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내 가까운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온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앵두 같은 입술로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약효가 이미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 앙증맞은 손으로 남자의 몸을 마구잡이로 더듬거리며 해독제를 찾았다. 여태껏 여자의 손길을 느껴본 적이 정서준은 곧바로 바짝 긴장하며 품에 안긴 그녀를 밀어냈다. “가만히 있어.” 분명 차가운 명령조였으나 자세히 들어보면 페이스를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내 커다란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는 특수 비행대대 비행사로서 각종 방첩 훈련을 받았고, 필수 해독제를 수시로 지니고 다녔다. 곧이어 손톱만 한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고 빨간 알약 한 알을 털어낸 다음 손을 뻗어 온서우의 턱을 잡고 억지로 입을 벌려 약을 먹였다. 상쾌하면서 청량한 느낌이 입안을 가득 채웠고, 아까만 해도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하더니 무방비 상태에서 남자의 시선과 부딪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희고 매끄러운 얼굴이 코앞에 나타났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다. 이때, 정서준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속으로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시종일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상한 기분을 애써 외면한 채 뒤돌아서 떠나려고 했다. 해독제도 이미 먹였고, 인신매매범 또한 놓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온서우는 고작 1초 만에 다시 원상 복귀했다. 이내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남자가 떠나려는 것을 본 그녀는 갑자기 팔을 뻗어 두꺼운 목을 감싸 안더니 머리를 끌어당겨 까치발을 들고 도톰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촉촉한 눈망울로 천진난만하게 남자를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여자의 대담한 행동에 정서준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태생이 고지식한 사람인지라 결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손으로 목을 감싼 가녀린 팔을 끌어내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똑바로 서! 지금 뭐 하는지 알고 있어?” 온서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절레절레 저으며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서준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대답해. 다른 사람이 구해줘도 이렇게 대할 거야? 똑똑히 봐, 내가 누군지 알겠어?” 온서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화장실 밖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대장님, 안에 계세요?” 정서준은 그녀가 다시는 들러붙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어깨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문을 열었다. 온서우는 붙잡힌 와중에도 사지를 버둥거리며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껴안고 넓은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문이 열리자 손민재는 서로 껴안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맙소사!’ 평소에 개처럼 훈련시키고 주변의 여성 대원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대대장이 여자를 껴안고 있다니? 게다가 비행복은 아무도 못 만지게 했는데 지금은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군.’ 하필이면 온서우는 이 순간에도 정서준의 옷을 헤집고 다녔다. 손민재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머릿속으로 수많은 19금 화면이 스쳐 지나갔다. “가만히 있어!” 정서준은 옷깃을 헤치는 온서우의 손을 떼어내더니 고개를 돌려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범인은 잡았어?” 그제야 정서준을 찾아온 목적을 떠올린 손민재는 서둘러 대답했다. “잡긴 잡았는데 자기가 아니라고 계속 시치미를 떼는 탓에 경찰이 대대장님께 심문에 협조해 달라고 하네요.” 정서준이 고개를 돌려 온서우를 바라보았다. 해독제가 드디어 효과를 발휘했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왔고 제법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마침 빨간 완장을 찬 여성 승무원이 다가오자 말을 걸었다. “저기요. 이 여자 잘 좀 보살펴 주시겠어요?” 승무원은 객실의 소동을 전해 듣고 찾아왔기에 얼른 다가가서 온서우를 부축했다. 정서준과 손민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철도 경찰을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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