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너 여권도 없이 어딜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여권, 신분증 다 나한테 있어!”
“제 여권이 고모한테 있다고요?”
“그래! 전화해도 안 받고, 묵는 호텔에 가서 널 찾으니까 여권이랑 신분증을 두고 갔다고 하더라! 내가 고모라고 하고 받아왔어. 너는 무슨 배짱으로 5성급 미만 호텔을 잡아? 제성에 지내는 동안은 고모네 집에서 지내도록 해!”
원유희는 지금 당장이라도 고모 집으로 가고 싶었다.
“못 가요. 오랜만에 친구네 집에 왔더니 며칠 좀 더 있다가 가라네요. 여권 받으러 갈 때 연락 드릴게요.”
“얘는 무슨, 몇 년 동안 안 돌아왔었잖아. 네가 친구가 어디 있어?”
“예전에 고등학교 동창들이요…….”
원유희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유희야, 나는 네가 김신걸 때문에…… 이미 지난 일이니 너무 거기에 머물러 있지는 마.”
……
“고모네 집으로 와.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
“나중에 갈게요.”
원유희는 전화를 끊고 미끄러지듯 침대 끝에 걸터 앉았다.
김신걸이 보내주지 않으면 그녀는 이 저택을 나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김신걸은 순순히 그녀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김신걸의 눈에는 고모가 자신의 가정을 파괴한 아버지의 내연녀일 뿐이니까.
*
점심시간.
원유희는 경호원의 안내로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그녀는 식탁 가득 차려진 해산물 요리를 보고 얼굴이 굳었다.
캐비어, 자연산 전복, 무늬오징어…… 모두 비싼 식재료였지만, 그녀에게는 모두 독일뿐이다.
원유희는 애피타이저로 준비된 샐러드만 깨작거렸다.
그 순간 하인이 가져오는 음식 냄새에 그녀가 젓가락을 던지고 숨을 헐떡였다.
“잠깐 멈춰요! 지금 들고 오는 그거 뭐죠?”
“해물탕입니다.” 하인이 말했다.
원유희는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못 먹었는데, 뭐라도 먹어야지……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원유희는 식탁에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살폈다.
“나보고 맨밥이나 먹으라는 거죠?”
“…….”
그곳에 있던 하인들이 원유희를 보고 놀랐다.
원유희는 샐러드를 반찬으로 밥만 먹었다.
그렇게 3일을 버티는 동안 원유희는 저택에서 김신걸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마치 사막에 원유희를 버려둔 채 알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하이에나 같았다.
영양분을 고루 섭취하지 않아서 인지 정신이 몽롱하고 몸에 힘이 없었다.
‘이러다가 아이들도 못 보는 거 아니야?’
원유희는 그런 생각이 들자 공포감이 몰려왔다.
다음날도 식탁에 한 가득 차려진 해산물이 있었다. 원유희는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김신걸 도대체 어디에 있죠?”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들도 김 선생님께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집사 해림이 말했다.
“도대체 나를 언제까지 가둬둘 겁니까?”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그녀가 말을 하다 멈췄다.
하인들에게 무슨 죄가 있나 이 모든 건 김신걸의 계획일 텐데.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엄마랑 오래 떨어져 본 적 없는 아이들이 울거나 보채지는 않을지…….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을 때, 저택 주차장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는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김신걸이 아니었다.
짙은 뿔테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은 멀끔한 남자가 쇼핑백을 들고 원유희 앞에 섰다.
“원유희 씨?”
그 남자의 시선은 원유희의 맨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누구시죠?”
“아, 저는 김 선생님의 수석비서 고건입니다.”
“그 사람이 당신을 보낸 건가요?”
“제가 원유희 씨를 김 선생님께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일단 이거 받으시지요.”
고건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원유희에게 줬다.
“이게 뭐죠?”
“이건 입으실 옷과 신발입니다.”
“저는 어디로 가는 거죠?”
“일단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시죠.”
*
클럽.
타이트한 블랙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원유희.
가슴, 허리, 엉덩이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확실히 나온 원유희의 몸매에 남자들의 시선이 꽂혔다.
그들은 원유희의 각선미에 홀린 듯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그녀의 곁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고건은 그런 남자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원유희를 데리고 클럽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발코니 문이 열리자 방금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남자들은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세게 끌어안았다.
원유희의 등장으로 여자들의 질투 어린 눈동자가 모두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김신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술에 취한 남자들은 양쪽으로 여자를 안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원유희를 위아래로 훑었다.
“누구야? 새로 들어온 애야? 섹시하네.”
사람들에게 임 사장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시뻘건 얼굴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원유희의 허벅지를 쓸었다.
원유희는 역겹다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고건을 보았다.
“비서. 김신걸은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고건은 그녀만 두고 자리를 떴다.
원유희는 이곳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방금 고건도 임 사장의 말에 해명해주지 않은 거지? 그리고 내가 왜 여기서 김신걸을 기다려야 해?’
원유희가 스테이지 옆에 서서 김신걸을 기다리고 있는데 임 사장이 잔을 들고 원유희 앞에 다가왔다.
“이리 와봐. 처음이지? 오빠가 부드럽게 해 줄게.”
원유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임 사장! 왜 뉴페이스를 네가 먼저 채가? 아가씨, 이리 와 내 옆에 앉으면 내가 백만 원 줄게.”
“야! 단가 올리지 마! 뉴페이스 버릇 나빠진다고! 그래도 난 이백.”
원유희는 말다툼을 하는 두 아저씨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오해하셨네. 저 여기서 일하는 사람 아니에요.”
“겁나 비싼 척하네. 넌 네가 다이아라도 되는 줄 알아? 딴 놈들 손 타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먼저 가지고 놀까 했더니! 야 이 계집애야 고고한 척하지 마! 여자들 벗겨놓고 보면 다 똑같아! 에이 재수 없어!”
임 사장이 원유희를 몰아붙였다.
“하, 당신 지금 뭐라고했어?”
“아직도 고고한 척하네? 너는 뭐 달라? 확인해 봐?” 임 사장 옆에 있던 남자가 말을 거들었다.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건지 내가 먼저 확인을 좀 해야겠어!”
임 사장은 원유희의 손목을 끌어당겨 소파에 앉히더니 거칠게 그녀의 옷을 뜯었다.
“이거 놔!” 원유희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관성에 의해 뒤로 밀렸고, 그녀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원유희, 내 환영식이 마음에 안들어?”
원유희는 다친 이마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웠다.
‘며칠 내내 탄수화물만 먹었더니 어지러워 죽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