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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점심때가 되니 온채원은 배가 슬슬 고픈 나머지 씩씩거리며 아침밥으로 샀던 죽과 찐빵을 우걱우걱 먹어 치웠다. 허기를 채우고 나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내 정원으로 나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을 시작했다. 고작 잡초를 뽑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이지 않은가? 드넓은 정원은 보기에 멀쩡했지만 잡초가 많긴 했다. 산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온채원에게 알록달록하게 핀 꽃들을 제외하고 농작물만 식물 취급할 뿐 나머지는 모두 잡초에 속했다. 잡초는 작물의 성장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제거하는 게 맞았다. 결국 정원의 푸르른 잔디마저 모조리 뽑았고 청소도 열심히 했다. 박태성이 일부러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박민철도 손자의 성격이 워낙 고약하다고 했으니 아내로서 남편의 단점을 이해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몇 시간 동안 바삐 움직인 온채원은 그제야 한숨 돌리고 안성자에게 연락해서 근처에 있는 유일한 재래시장의 위치를 알아냈다. 재래시장은 제8구역에 있고, 동네에 사는 어르신들이 보존해달라고 요청한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했다. 온채원은 야채를 바리바리 들고 지갑에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바라보았다. 현재로서 일자리가 시급했다. 이제 장을 봐서 박태성에게 요리까지 대령해야 하는 상황이다. 성주시는 물가도 비싸고, 딱 봐도 호의호식하며 자란 남자가 그녀와 달리 고생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기에 지금 가진 돈으로는 분명 부족할 것이다. 어쨌거나 온채원은 박태성의 집에 살면서 모든 걸 공유하는 이상 장보고 밥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결혼도 했으니 생활비를 분담하는 게 맞았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본인이 이득이라는 생각에 일해서 돈을 벌면 박태성에게 더 좋은 걸 먹이기로 마음먹었다. 고민에 빠진 온채원은 생선 가게로 곧장 걸어가 대뜸 물었다. “아저씨, 혹시 생선 잡는 사람 필요하지 않으세요?” 생선 가게 아저씨가 온채원을 올려다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긴 하지.” “저를 고용하실래요?” “농담도 참, 젊은 아가씨가 물고기도 만지지 못할 것 같은데...” 10분 뒤, 생선 가게 아저씨는 능수능란한 칼솜씨로 광어 한 마리를 깔끔하게 회를 뜨는 온채원의 모습을 넋을 잃고 감상했다. “아저씨, 원하시면 더 얇게 썰어 드릴 수도 있어요.” “아니야... 이미 충분해. 단지 월급이 많지는 않은데 한달에 80만 원도 괜찮아?” “그럼요! 좋아요.” “알았어. 그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해.” 온채원은 생선 가게 아저씨와 기쁜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일하는 시간도 적당하고, 집에서 멀지 않아 박태성을 돌보는 데도 지장이 없다. 온채원은 별장으로 돌아가 기분 좋게 저녁을 준비하고 박태성이 와서 밥 먹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음식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었지만 박태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온채원은 참다못해 찐빵으로 배를 채우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정원 의자에 앉아 대문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다시 기다렸다. 그러다가 박태성의 연락처라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적어도 평소에 전화를 걸어 언제 집에 와서 밥을 먹을 건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오후 내내 바삐 보낸 온채원은 등까지 기대어 편하게 앉아 있다 보니 눈꺼풀이 점점 내려와 의식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박태성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12시가 넘었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었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불이 훤히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고, 주황색 불빛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유일한 빛처럼 느껴졌다. 이내 정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박태성은 흠칫 놀랐다. 누군가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발소리에 깬 온채원은 눈을 서서히 떴고, 박태성을 발견하자 졸린 눈을 비볐다. “태성 씨, 왔어요? 정원은 다 정리했거든요?” 박태성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원을 훑어보았다. “네가 난초들을 싹 뽑았어?” “잡초 아니었어요?” 온채원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하, 2천만 원이 넘는 난초가 네 눈에는 쓸데없는 잡초처럼 보여? 똑같은 걸 사서 다시 심어놔.” 온채원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2천만 원이라니?!’ 그녀가 뽑은 풀이 무려 2천만 원이 넘는다니! 박태성은 여자를 뒤로 하고 별장으로 들어갔다. 이내 뒤따라온 온채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뭐라도 변명하고 싶었다. 식탁 위에 놓인 싸늘하게 식어버린 저녁밥을 보자 그대로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요리할 줄 모르면 아주머니께 여쭤 봐. 네가 만든 건 짐승도 못 먹어.” 쌀쌀맞은 말투로 쏘아붙인 남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2층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이미 식어버린 세 가지 반찬과 국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물론 그녀는 충분히 푸짐하게 차렸다고 생각했다. 민둥산에서는 보통 한 가지 반찬만 먹었는데 오늘은 고기와 야채가 골고루 갖춰졌으며 심지어 계란국도 있다. 온채원은 박태성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저녁밥은 안중에도 없은 채 뒤돌아서 정원으로 후다닥 뛰어가 오후에 뽑아서 구석에 쌓아 둔 난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고생은 두렵지 않았고, 매를 맞고 욕을 먹어도 끄떡없지만 이렇게 비싼 난초를 망가뜨렸다는 사실이 용서가 안 되었다. 민둥산에 있는 아이들은 올해 교과서도 아직 갖추지 못했는데... 그녀는 무려 2천만 원이나 날려버린 셈이었다. 온채원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사실 웬만해서 울지 않았고, 어렸을 때 산에서 굴러떨어졌을 때도 눈물을 꿋꿋이 참아냈다. 하지만 본인이 저지른 끔찍한 일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박태성은 2층에서 창문 너머로 정원에 쪼그리고 앉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울어?’ 어제 별장에 당당하게 쳐들어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손찌검까지 마다하지 않고, 오늘 아침에는 그에게 주먹다짐도 한 사람이 고작 난초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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