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국수를 먹고 나서 박태성은 여전히 별장에 남아 있었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온채원은 온몸이 흙투성이에 열이 나서 땀까지 흘린 탓에 끈적거려 더는 참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다시 찬물로 샤워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물론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니라 괜히 아파서 남한테 피해를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온채원은 박태성의 곁으로 쭈뼛쭈뼛 다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성 씨, 혹시... 욕조에 뜨거운 물 어떻게 받는지 알려주면 안 될까요?”
비록 깨어 있었지만 남자는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그녀를 상대하기 싫은 모습이 역력했다.
온채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성격이 외향적이고 밝은 편이긴 했으나 여태껏 남자와 단둘이 있는 건 처음이라 사실 무척 어색했다.
박태성이 무시하자 결국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욕실에서 안성자에게 전화를 걸어 온수 사용법을 물어보면서 한 편으로 조작해 보았다.
하지만 욕조를 가득 채운 냉수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결국 통화로는 해결이 안 되어서 이따가 안성자가 별장에 와서 가르쳐주기로 했다.
온채원은 안성자가 도착하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박태성이 갑자기 그녀의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심지어 욕실에 있는 자신을 보고도 거리낌 없이 곧장 다가왔다.
잠을 설친 박태성은 짜증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사실 온채원을 찾아온 이유도 어젯밤에 난초를 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왜 마음이 진정되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들어오자마자 욕조를 채운 찬물을 발견하고 순식간에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박태성이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하, 일부러 찬물로 샤워해서 감기 걸리고 내 앞에서 아픈 척한 거야? 연기가 보통이 아니군.”
온채원은 매를 맞아도 끄떡없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는 건 용납 못 했다.
이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해명했다.
“아니에요! 단지 온수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그랬어요.”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태성은 샤워기의 찬물을 틀었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온채원의 머리를 적셨다.
그녀는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고, 황급히 눈을 가리고 발끈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한편, 박태성은 피도 눈물도 없는 독사처럼 냉소를 지었다.
“찬물로 씻는 걸 좋아하잖아? 이참에 제대로 샤워해 보던가.”
이내 차가운 물이 옷을 적셨고, 거머리처럼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박태성의 모습은 마치 악랄한 대마왕을 연상케 했다.
물론 온채원도 순순히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내 박태성의 손에 든 샤워기를 빼앗으려고 대뜸 돌진했다.
하지만 키가 너무 커서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몸통 박치기했고, 박태성은 중심을 잃은 나머지 휘청거렸다.
등 뒤에 마침 찬물이 반쯤 담긴 욕조가 있는지라 쓰러지기 전에 온채원을 덥석 낚아채서 두 사람은 동시에 풍덩 빠졌다.
온채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손을 대지는 않았다. 물론 상대가 안 될까 봐 지레 겁먹은 건 아니고 단지 어제 아픈 그녀를 돌봐주던 모습이 떠올라 고마운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박태성에게 붙잡혀 찬물에 빠진 상황에서 비아냥거리는 남자의 눈빛을 마주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곧이어 어깨를 덥석 붙잡고 힘껏 깨물었다.
‘괘씸한 남자 같으니라고!’
이때, 안성자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그리고 입을 떡 벌린 채 눈앞의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도련님은 청소년 이후로 낭패를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상대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렸고, 심지어 반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
무려 친히 나섰다가 다른 사람과 함께 욕조에 빠지는 허술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을 보며 안성자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도련님, 채원 씨한테 온수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러 왔는데...”
안 그래도 감기 기운이 남아 있었는데 박태성에게 붙잡혀서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어 오한까지 밀려오니 온채원은 괜스레 억울했다.
결국 애꿎은 마음에 목소리마저 울음기가 묻어났다.
“태성 씨, 저도 다른 사람과 같이 생활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에요. 최대한 챙겨주고 잘해주고 싶은데 혹시 잘못한 게 있으면 이러지 말고 말로 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