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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말을 마친 고아람은 망설임 하나 없이 그를 지나쳐갔다. 서지훈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매번 두 사람이 싸울 때면 늘 고아람이 먼저 사과를 했었고 그는 이미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었던 터라 지금 그에게 숙이라는 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고아람이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그는 기분이 엉망이라 친구를 불러 술을 마시고 기분 전환을 하려고 했다. 방 안의 분위기는 몹시 괴이했고 조용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요 며칠, 여아름이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끓고 있었다. 이제 모두가 금지 물품 사건의 전말은 여아림이 고아람을 모함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도 전부 고아람이 집에만 있기 심심해서 그런 것에 손을 댔다고 오해를 했는데 알고 보니 여아름이 연약한 척을 너무 잘해서 그들 모두를 속인 것이었다. 그들 모두 여아름이 장장 3개월을 써서 누군가를 모함할 정도로 계략적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섬뜩한 사람이었다. 바로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 어쩌면 속에서 이미 상대를 해칠 계산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여아름의 일은 자리에 있는 남자 모두에게 제대로 교훈을 줬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다. 주지안이 먼저 침묵을 깼다. “지훈아, 너 아람 씨랑 이혼했어?”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 짜증이 서려 있었다. 소파에 기대앉은 서지훈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냥 짜증 좀 부리는 거야.” 주지안이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이번엔 진심으로 너랑 헤어지려는 것 같은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지훈에게로 향했다. 여아름의 일 때문에 고아람은 확실히 서운할 법했다. 이번 일로 서지훈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졌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아람이 재판장에서 열심히 발버둥을 치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수갑을 차고 형을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서지훈은 방금 전 자신이 본 고아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긴 머리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자르다니,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의 화를 돋우기 위한 게 분명했다. 진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주 평온해야지 그렇게 온갖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화를 돋우고 신경 쓰이게 할 리가 없었다. 캠퍼스 연인에서 부부가 되는 동안 그들의 감정은 7년이나 이어졌다. 그걸 잘라내기란 쉽지 않았다. “술이나 마셔.” 그는 주지안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지만 주지안의 두 눈에 빛이 반짝였다. 그에게는 세상 누구도 모르는, 8년이나 숨긴 비밀이 있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짝사랑 말이다. 고아람은 시간에 맞춰 로펌에 출근했다. 박해일이 이야기를 한 탓에 입사 처리는 순조로웠다. 장민우는 그녀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 뒤 박해일의 사무실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자리로 안내해 줬다. “앞으로 이 자리 사용하시면 돼요.” 고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박 변호사님께 가죠.” 박해일의 사무실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통화를 하고 있는 훤칠한 키의 그는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고 회색 정장에 짙은 회색의 셔츠, 검은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꼿꼿한 자세에 넓은 어깨, 좁은 허리 긴 다리에 단단한 근육은 완벽한 몸 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장민우가 고아람을 데리고 온 그는 고아람만 있으면 된다고 손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장민우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박해일은 계속 통화 중이었다. 상대가 뭐라고 한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통화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듯했다. 통화 내내 고아람은 얌전히 입구 쪽에 서 있었고 박해일은 그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고아람은 눈앞의 남자를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살짝 시선을 내렸다. “변호사님.” “테이블에 있는 서류들 정리하세요. 이틀 내로 모든 사건 파일 확인하시고 사건의 빈틈을 찾아내세요.” 그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담담했다. “네.” 고아람이 대답하자 박해일은 그녀를 지나쳐 성큼성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박해일과 고아람의 거리가 가장 가까웠던 그 순간, 고아림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옅은 머스크 향까지 맡을 수 있었다. 고아람은 박해일의 테이블 앞으로 가 사건 파일들을 안아 들었다. 서지훈과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며 집안일은 거의 그녀가 다 한 탓에 가벼운 것이든 무거운 것이든 직접 들어 옮겼었다. 사건 파일이 꽤 무거웠지만 고아람에게는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다. 사건 파일을 전부 자기 자리고 가져간 고아람은 두 줄로 나누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새로 받은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의자를 끌어 앉은 그녀는 왼쪽부터 보기 시작했다. 아마 로펌에서 했던 사건인 듯 보였다. 박해일이 고아람에게 보라고 한 건 그저 그녀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문제를 파악할 만큼 예리한 것인지, 중요한 포인트를 잡아낼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고아람은 이 업계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그 많은 파일을 보면서도 지루해하기는커녕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었다. 오전은 그렇게 빠르게 흘러갔다. 아침에 나갔던 박해일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 그녀는 계속해서 사건 파일을 보고 있었다. 이틀의 양을 하루 만에 다 보기엔 무리라 퇴근한 뒤 계속 보기 위해 가져가려고 했다. 띵동-. 방 벨이 울려 고아람은 문을 열었다. 신미연은 술을 조금 마신 듯 두 볼이 조금 붉어져 있었고 말투에는 취기가 묻어 있었다. “무슨 일로 나 찾았어?” 고아람은 서랍을 열어 안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다. “어디에 투자를 하든 상관없어 원금만 손해 안 보면 돼. 버는 건 다 네 거야.” 신미연은 시선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안에 얼마 있는데.” “40억.” “미친.” 신미연은 곧바로 카드를 받았다. “이번 달성과 왕은 무조건 나야. 이번 달 보너스도 분명 받을 수 있을 거야.” 고아람은 자리에 앉아 계속 사건 파일을 살펴봤다. 신미연이 슬쩍 다가왔다. “벌써 사건 배정받은 거야?” “그럴 리가, 대외적으로 수습 변호사지 사실은 박해일의 조수지. 다만 너도 알다시피 이건 업계 절차잖아. 생각해 봤는데 박해일 따라다니면 배울 게 많을 것 같더라고.” 고아람은 물을 한 잔 마셨다. “아직 부모님한테는 이혼한 거 얘기 안 했지?” 신미연은 테이블을 정리해 주었다. 배달을 시켜 먹은 그릇이 아직도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어 신미연은 전부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고아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며칠 있다가, 자리 잡으면 말할래.” 신미연은 코웃음을 쳤다. “그때 또 난리 나겠네.” 그도 그럴 것이 고아람의 부모는 서지훈을 아주 마음에 쏙 들어 했었다. 이제 이혼한 걸 알게 되면 고아람을 잡아먹으려 들지도 몰랐다. “그런 짜증 나는 얘기는 그만하자.” 고아람은 그런 것들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신미연은 방 안을 둘러봤다. “계속 호텔에서 지내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아직 적당한 곳을 못 찾았어.” 고아람도 이대로 계속 지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가 좀 찾아봐 줄게.” 신미연은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여기서 잘래.” “너 여기서 자면, 너네집 강아지는? 오늘 독수공방하는 거야?” 고아람이 짓궂게 신미연을 놀리자 신미연은 이불을 덮으며 호탕하게 말했다. “오늘 밤엔 좀 쉬라고 해, 매일 하다간 허리 부러질까봐 걱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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