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주방에는 분주히 일하던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에도 아무도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는데 화면 속에는 온통 카드 사용 내역 알림뿐이었다. 그 어떤 누구의 연락도 받고 싶지 않았던 서지훈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놨었다.
[XX은행]끝번호 0081계좌의 카드 사용 내역, 11월 29일 15:17, 6,007,000원 결제되었습니다.
15:26, 11,180,000원 결제되었습니다.
15:45, 5,200,000원 결제되었습니다.
16:00, 15,760,000원 결제되었습니다.
16:12, 13,600,000원 결제되었습니다.
13,200,000원, 22,246,000원 결제….
길게 늘어진 결제 내역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고아람에게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자 미간의 주름은 더욱더 깊어졌다.
그는 돈이 아까웠던 게 아니었다. 그저 이런 때에 옆에 없으니 왠지 허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짜증스레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조금도 조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넥타이가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기분이었다.
아예 그는 일을 하면서 진정을 하려고 했다.
그렇게 서재에 들어간 서지훈은 테이블에 놓인 이혼서류를 발견했고, 고아람이 4년 내내 단 한 순간도 뗴어내지 않았던 결혼반지를 발견했다.
서지훈의 안색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그는 다시 한번 고아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 시각, 고아람은 신미연과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한창 즐기고 있었던 터라 울렸다 멈췄다 다시 울리는 휴대전화 벨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고아람은 이튿날이 되어서야 수십 개나 쌓인 부재중 전화를 발견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어젯밤에는 너무 달렸었다.
지금쯤 서지훈도 이혼서류를 봤을 거란 생각에 그녀는 콜백을 했다.
꽤 빠르게 연결된 통화에 그녀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는 몹시 바빴던 터라 전화를 바로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던 데다 가끔은 아예 받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일이 바쁘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되레 빨랐다.
“어젯밤에 뭐 했어.”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잔뜩 가라앉은 것이 마치 따져 묻는 것만 같았다.
예전의 고아람은 서지훈의 기분에 몹시 신경을 기울였다.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빠 보이면 곧바로 달래주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고아람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이혼 서류는 내가 작성했어. 확인하고 문제없으면 사인해.”
“고아람, 적당히 해. 나 배고파, 와서 아침 차려줘.”
어젯밤에 고아람이 미친 듯이 그의 카드를 긁은 것을 서지훈은 그저 투정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아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혼서류를 보고도 딱히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밖에서 밤새 놀았으니 지금쯤 화도 풀렸어야 했다.
고아람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혼하자니까, 내 말 못 알아들어?”
“고아람, 진심이야?”
고아람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서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아람, 너 졸업하자마자 나랑 결혼했어. 경력도 없으면서 나랑 이혼한 다음에 너 뭐로 벌어먹고 살려고?”
“내가 죽든 말든 당신 알 바 아니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내가 작성한 이혼 서류에 도장이나 찍어. 더 많은 건 안 바랄게. 재산은 반으로 나눠. 뭐가 됐든 그래도 7년의 세월을 당신과 함께했잖아.”
고아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난리가 나 있었다. 입생로랑의 하이힐은 널브러져 있었고 샤넬의 흰 트위드도 침대맡에 걸쳐져 있었고 버버리의 외투는 아예 입구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신미연이 남긴 남긴 쪽지를 확인했다.
“제발, 술도 못하면 좀 적당히 마셔. 온갖 데다 다 토해서 내가 벗겼어. 아침에 일어나면 알아서 씻어.”
“고아람, 너 후회하지 마!”
서지훈이 버럭 화를 냈다.
뚝.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은 고아람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있는 주소를 서지훈에게 문자로 보냈다.
[재산 분할에 대해서는 이혼 서류에 전부 적었어. 확인해 보고 문제없으면 이쪽으로 퀵 보내.]
서지훈은 주방 문 앞에 서 있었다. 배는 고팠지만 그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매일 아침 7시면 반드시 아침을 먹어야 하는 것이 그의 루틴이었고 평소에는 고아람이 시간을 맞춰 아침을 준비해 줬었다.
웅웅….
휴대폰이 울려 꺼내 보니 고아람의 문자였다.
문자 내용을 확인한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주 재미들였지?’
그는 고아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 정말로 자신과 이혼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아름의 존재에 대해 진즉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내내 모른 척했던 건 다 자신을 향한 미련 때문이 아니던가?
만약 정말로 이혼을 하려고 했으면 진작에 했지 지금까지 기다릴 것도 없었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저 오기 부리는 것뿐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그는 자존심을 부리며 서재로 가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하고는 씩씩대며 퀵을 불렀다.
고아람은 마른 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어제 정말로 많이 마시긴 한 건지 어떻게 돌아온 건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곧바로 욕실로 가 샤워를 했다.
씻고 나온 그녀는 타월을 두르고 거울 앞에 서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봤다.
어제 쇼핑을 하며 신미연은 그녀를 끌고 마사지부터 시작해 손 관리까지 받았고 고아람도 이렇게 된 거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에 길게 기르고 있던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녀는 타고난 갈색 머리인 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드러운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끝도 살짝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늘어놓으면 청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서지훈은 침대에서 그녀의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당신 머리가 흐트러져 있는 걸 볼 때면 괴롭히고 싶어.”
특히 두 사람이 막 일을 끝내고 나면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에 달라붙어 더없이 매혹적이었다.
긴 머리는 그녀의 청순함을 강조한다면 짧은 머리는 개성이 돋보여 그녀의 이목구비를 잘 보여주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 작은 얼굴이 전부 드러나는 탓에 그녀는 이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띵동….
벨 소리가 울려 그녀는 샤워 타올을 두르고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퀵 배달 기사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고아람 씨 맞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