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이 말을 듣고 여준수는 분명히 놀랐지만 곧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 설마 인제 와서 날 사랑하게 됐다 이런 말 하려는 건 아니지? 정은지, 무슨 의도가 있든 솔직히 말해. 나한테는 그렇게 가식 떨 필요 없어.”
여준수만큼 정은지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성격,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여준수는 모두 꿰뚫고 있었다. 물론 정은지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런 정은지가 여준수에게 순순히 다가올 리 없었다.
그러나 여준수는 몰랐다. 과거의 정은지는 이미 사라졌고 지금의 그녀는 모든 것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로 불타고 있다는 것을.
“준수 씨,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아무 속셈도 없어.”
정은지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자신을 믿어주길 바랐다.
잠시, 주변의 공기가 전부 멈춘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준수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더니 갑자기 냉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내 탓 하지마.”
다음 순간, 정은지가 반응하기도 전에 여준수는 단단한 팔로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계단을 올라가더니 마침내 정은지를 침실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
모든 게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정은지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고 따뜻한 감각이 순간적으로 온몸을 감싸 안았다.
“정은지, 기억해 둬.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약혼식 날 밤에는 분명 울면서 날 미워한다고 소리쳤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순순히 다가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변한 거야?’
잠시 침착해진 여준수는 이내 몸을 일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어디 가려고?”
정은지는 여준수가 또 떠나려는 줄 알고 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지 마.”
그러자 그는 가볍게 대답했다.
“샤워.”
떠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정은지는 안심했고 곧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반 시간 후.
욕실 문이 열리자 정은지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마치 홀린 듯 여준수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던 정은지는 여준수의 냉담한 표정을 보며 급히 정신을 차렸다.
“얼른 샤워해.”
그제야 얼굴이 붉어진 채 정은지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십여 분 후.
욕실에서 나온 정은지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멀리서 바라보니 여준수의 차가운 모습 속에서 어딘가 고독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은지는 갑자기 과거가 떠올랐다. 그때의 정은지는 항상 여준수를 무시했고 한 번도 제대로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여준수는 몇 안 되는 친구를 제외하고는 늘 혼자였다는 것을.
그토록 뛰어난 여준수는 홀로 회사를 짊어지고 모든 문제에 맞서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실패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떠올리자 정은지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여준수는 정은지가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머리 빨리 말려. 감기 걸리겠다.”
그러나 정은지는 고개를 저으며 순수한 얼굴로 여준수를 올려다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머리 좀 말려줄래?”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여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소파에 앉아.”
곧 정은지는 아이처럼 웃으며 순순히 짙은 갈색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여준수는 드라이기를 들고 정은지의 뒤로 다가갔다.
드라이기를 정리했을 때 정은지는 어느새 소파에 누워 잠이 든 상태였다.
고요하게 잠든 그녀의 피부는 아기처럼 부드러웠고 이목구비는 작고 섬세하며 그 순수한 모습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여준수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깊은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점점 정은지를 꿰뚫어 보기 어려워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