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권경현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눈동자 깊은 곳엔 원망이 짙게 배어 있었다.
“지금 당장 내의원으로 가지 않으면, 하반신이 영영 쓸모없어질지도 모르겠네.”
나는 끓어오르던 감정을 겨우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권경현은 아랫도리를 감싸쥔 채 어두운 낯으로 말했다.
“공주마마, 어찌 그리도 무정하시옵니까.”
“내가 무정해? 일국의 공주인 나를 여기 막아 세운 넌, 내가 어떻게 되길 바란 건가?”
나는 그의 속내를 찌르듯 내뱉고는 덧붙였다.
“계속 막고 있을 텐가! 이번엔 진짜 평생 고자 신세로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함께 내의원으로 가시지요.”
권경현은 여전히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나는 싸늘히 웃으며 다시 발을 들었다. 이번에는 권경현도 놀라 황급히 몸을 피했다.
그가 움찔하며 겁먹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나는 담담히 말했다.
“내 손이 망가진다고 한들, 난 여전히 이 나라의 공주야. 근데 권 도령은 어떻게 되겠나? 씨도 못 남기는 서자를 어느 가문 규수가 지아비로 삼고 싶겠나? 게다가 공주에게 손찌검한 죄인을 말이야...”
권경현의 눈에 잠시 흔들림이 비쳤고, 나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탄신연이 열리는 근정전 쪽으로 몸을 돌려 달렸다.
도착했을 땐 마침 헌상 순서가 한창이었다.
민연아는 세자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긴 했지만, 신분과 서열 탓에 첫 번째 헌상 자리는 차지하지 못했고, 몇 순위 뒤로 밀려 있었다.
다행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뻔했다.
궁문을 들어서는 순간, 몇몇 내시들이 아바마마 앞에서 비단을 천천히 펼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탄신 예물은 크고 웅장했다. 실크 위엔 강산이 수놓아져 있어 장관이었고, 각도를 달리하면 조명에 따라 팔도의 명승지가 하나씩 떠올랐다.
그렇게 마지막엔 사해봉례도(四海奉禮圖)로 완성됐다. 화려하고 섬세했으며 담고 있는 뜻 또한 깊었다.
보는 이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수작이었다.
역시나 아바마마도 흐뭇한 표정으로 그 비단을 바라보며 깊은 만족을 보이셨다.
“이 예물, 참으로 뛰어난 작품이구나. 짐은...”
아바마마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 민연아가 환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상을 받을 준비를 했다.
그 순간, 나는 눈에 뵈는 것 없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아바마마, 저건 분명 소녀가 준비한 탄신 예물입니다. 소녀의 예물을 저 여인이 가로채 간 것이옵니다!”
그 한마디에 장내는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
민연아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이휘는 얼굴이 확 굳었다. 아마도 권경현이 나를 붙잡아두지 못한 것을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한 글자 한 글자에 피를 토할 듯한 억울함을 꾹꾹 눌러 담았다.
“세자 저하께서는 분명 제 오라버니이시옵니다. 그런 분께서 혈육인 공주의 수고를 외면하고, 그 공을 남의 손에 넘기시다니요. 이 자수법은 온 천하에 저밖에 모르는 독창적인 자수법입니다. 그런데 저 여인이 어찌 흉내 낼 수 있겠사옵니까?”
나는 숨을 고르고,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왕실 혈육의 정을 저버린 자 하나, 왕명을 가볍게 여긴 자 하나, 그리고 그 죄에 가담한 자 하나... 죄인 셋이 짜고 벌인 일입니다. 이는 대역죄가 아니겠사옵니까... 삼족이 아니라 구족이 멸할 죄란 것을 감히 아뢰옵니다!”
내 말이 끝나자, 장내는 또 한 번 얼어붙었다.
이휘는 균형을 잃은 듯 비틀거렸으며, 민연아는 당장이라도 혼절할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바마마는 침묵 속에 우리 셋을 차례로 훑어보셨다. 눈빛엔 쉽게 읽히지 않는 무언가가 스쳐 갔다.
“셋이라 하였느냐. 저 둘 말고, 또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조판서 권세진을 바라봤고, 입꼬리에 냉소가 번졌다.
“남은 하나는 권 대감 댁 둘째 아들, 권경현이옵니다.”
권세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공주마마, 그럴 리가...”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또박또박, 누구도 흘려듣지 못하도록 말했다.
“아바마마, 소녀가 근정전에 늦게 도착한 것은 모두 그 자 때문이옵니다. 곧 부마가 될 제 정혼자가 다른 여인의 청을 들어주며, 제게 그 앞길을 막지 말라 겁박하였사옵니다. 소녀가 뜻을 굽히지 않자, 감히 공주의 손목을 꺾으며 두 번 다시 자수를 놓지 못하게 만들겠노라 위협하였사옵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 여기저기서 숨죽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권세진은 얼굴이 시뻘게져 수염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망측한 것 같으니라고! 당장 그놈을 끌어내 사죄드리겠사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무사들에게 제지당해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아바마마는 눈을 감으셨다가 천천히 뜨셨고 피로가 서린 듯한 눈빛으로 대신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어마마마가 입을 열었다.
“공주가 다친 곳이 있다면 어의를 불러 보면 될 일입니다. 겨우 그것 가지고 전하의 탄신연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요... 다들 자리로 돌아가시지요. 다시 풍악을 울리거라...”
어마마마의 무심한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전생의 내가 떠올랐다.
같은 배에서 나온 오라버니라는 자는 연정에 눈이 멀었었고, 어마마마는 철저히 남의 편이었었다. 누명 하나로 아바마마의 신임까지 잃었던 그때, 그 모든 게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았었다.
나는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듯 아바마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권경현은 소녀를 아끼는 마음도 없고, 부마로서의 인품도 갖추지 못한 자이옵니다. 소녀는 그런 사람과의 혼인은 원치 않사오니, 부디 아바마마께서 혼약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내가 입을 열자 다시 한번 연회의 분위기가 뒤흔들렸다. 사람들은 들떠서 속삭이고, 누구도 이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이휘가 앞으로 나섰다.
“아바마마, 연우 공주의 언행이 요사이 사람답지 않사옵니다. 말도 앞뒤가 안 맞고, 정신도 흐려 보여 이 자리에 두는 건 온당치 않사옵니다. 부디 더 큰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물러가게 하소서.”
그제야 나는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진실을 뭉개고 나를 미친 여자로 몰아가며, 민연아를 지키겠다는 것, 한낱 거짓말 하나로 또 한 번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것이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권경현이 휘청이며 안으로 들어서더니, 곧장 아바마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공주마마께서 요사이 정신이 온전치 않사옵니다. 무언가 사악한 기운에 씐 듯, 언행이 심히 괴이하옵니다. 부디 궁에 가두고 도사를 불러 구마 의식을 치르게 하소서. 자칫 큰 탈이 날까 두렵사옵니다.”
겉으로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간청하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이쯤이면 완벽한 연기라 여기며 내심 웃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미쳐버린 공주로 몰아붙이기만 하면 이제부터는 자기 마음대로 날 주무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바마마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아바마마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연우 공주 말로는 그대가 공주를 이 자리에 못 오게 막았다 하더구나. 사실이더냐?”
권경현의 입술이 말라붙었다.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던 그는 뭔가 둘러대려는 눈치였지만, 아바마마의 눈빛이 다시 한번 차디차게 가라앉았다.
“잘 생각하고 대답하라. 궁에서 죄인을 다루는 수단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테니.”
천자의 위엄 앞에 권경현은 맥없이 주저앉았다.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무릎은 덜덜 떨렸다.
“신... 신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그 순간 아바마마가 상을 쾅 하고 내리치셨다.
“망측한 놈 같으니! 공주마마는 금지옥엽, 이 나라 왕실의 자제이거늘! 그 정혼자란 자가 보호는커녕 손을 들었단 말이냐! 그뿐이더냐? 어리광도 부족해 감히 공주를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으로 몰아가고, 누명까지 씌워? 정녕 살고 싶지 않은 게냐!”
권경현은 땅바닥에 털썩 엎드려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살려달라 애원했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아바마마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아바마마, 오늘 이 자리에서 권경현, 그 불충한 자가 마음에 다른 여인을 품고 소녀를 해하려 했음을 스스로 시인하였사옵니다. 이미 저희 사이의 정은 돌이킬 수 없이 금이 갔사오며, 아바마마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제 목숨을 앗으려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자와의 혼인을 더는 이어갈 수 없사오니... 부디, 혼약을 거두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