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경주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었다. 진수혁이 몰락한 가문의 딸 서지수를 마치 한 송이 꽃처럼 애지중지 보살폈다는 것을 말이다.
결혼 후 5년 동안, 그녀는 집에만 곱게 있으며 24시간 그의 곁을 맴돌 정도로 너무나도 순종적이었다.
이 세상 누구나 이혼을 얘기할 수 있지만, 서지수만큼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들 믿었다. 진수혁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 정말 소유리를 평생 책임질 생각이야? 지수 씨는 어쩌고?”
룸 안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서지수는 문을 열려던 동작을 멈추고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냥 밖에서 여자 한 명 더 거둘 뿐이야. 지수가 우리 집안 안주인이라는 건 변함없어. 그게 문제 되나?”
대수롭지 않은 듯한 진수혁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듣기 좋았지만, 서지수의 숨통을 옥죄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간신히 자세를 바로 세웠다. 가슴속에는 촘촘한 통증이 퍼지고 있었다.
결혼한 지 5년.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줬고, 사랑을 속삭이는 말도 해줬다. 하지만 결국 그녀 몰래 딴사람을 거두고 있었고, 그 상대는 하필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소유리였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지수 씨가 허락하겠어?”
안에서 대화는 계속됐다.
“지수는 순한 애야. 잘만 말하면 다 알아듣지. 게다가 거절할 수도 없잖아.”
진수혁는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화를 이어갔다.
서지수의 눈에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스치며 룸 손잡이를 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안에 가득했던 떠들썩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진수혁의 깔끔한 흰 셔츠가 어두운 무드 등 아래서 한층 빛나 보였다. 고아하고 우아한 분위기, 결점 하나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 그는 하늘의 총애를 받는 존재처럼 모든 편애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서지수가 들어오자, 진수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금세 풀었다. 그러고는 태연히 손짓했다.
“이리 와.”
마치 순종적인 고양이를 부르듯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서지수는 움직이지 않고 고집스레 그 자리에 선 채 입을 열었다.
“방금 한 얘기, 다 들었어.”
“형수님, 우리 그냥 농담한 거예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요.”
“맞아요, 형이 형수님을 그렇게까지 아껴왔는데 당연히 다른 사람이랑 다르죠.”
다들 진수혁을 두둔하며 서둘러 해명했지만, 서지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직 진수혁의 입에서 직접 답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의 태도에 진수혁은 갑자기 차가워진 기색으로 일어섰다. 훤칠한 몸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마침 잘 들었어. 나도 얘길 하려던 참이었거든.”
서지수의 가슴이 날카롭게 저렸다. 그는 애초에 변명할 생각조차 없었다.
진수혁은 룸 안의 다른 사람들을 전부 나가게 하고 조명을 환히 켰다. 그리고 늘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레 서지수를 안아 무릎 위에 앉혔다. 그의 손은 그녀의 허리 부근 부드러운 살을 더듬으며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려 했다.
“보고 싶었어.”
서지수는 속이 울렁여 힘껏 그의 품에서 몸을 뺐다.
“먼저 얘기부터 하자.”
진수혁은 붙잡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우리 지수가 성깔이 생겼네.”
서지수는 입을 다문 채 고집스럽게 그를 마주 봤다. 이미 태도는 분명했다.
진수혁은 몸을 뒤로 기대어 여유롭게 소파에 앉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해서 마치 오늘 저녁 식사 메뉴라도 논의하는 듯 들렸지만, 그의 말은 사람을 단숨에 지옥으로 떨어뜨릴 만큼 잔인했다.
“나는 네가 유리의 존재를 받아들였으면 해. 걔는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이거든.”
서지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것만 허락하면 너는 영원히 진씨 가문의 안주인이야. 아무도 네 자릴 건드릴 수 없어.”
진수혁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
소유리는 서지수의 대학 동창이자 절친이었다.
하지만 어쩌다가 사이가 틀어졌고, 지금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여자를 남편이 곁에 두겠다니 견딜 수가 없었다.
진수혁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주 잘 알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누가 받아들여? 정상인이라면 못 그래.”
서지수는 차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봤다.
“네가 허락하든 말든 상관없어. 난 걔를 평생 책임질 생각이야.”
진수혁은 의심의 여지 없이 단호했고 태도도 강압적이었다.
“네가 우리 집 안주인이니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서지수는 희고 가느다란 손을 꽉 쥐며 비웃듯 말했다.
“말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할까?”
“거절은 안 할게.”
그는 여전히 사람 약 올리는 재주가 있었다.
서지수는 분노로 가슴이 들썩였다.
예전에는 진수혁이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 처리에 다소 잔인한 면이 있어도 선은 지킬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그 가면이 벗겨지고 나니 인성의 악이 낱낱이 드러났다.
“진수혁.”
서지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기회를 주려 했다.
그는 느긋하게 시선을 들어 그녀를 봤다.
“말해.”
“내가 아무리 반대하고 싫어해도, 너는 그 여자를 무조건 곁에 둘 거지?”
서지수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니라고만 답해준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용서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진수혁은 그녀의 고집스럽고 굴복하지 않는 눈빛을 마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
“그래.”
서지수는 가슴이 칼에 베이듯 아팠다. 한가운데가 미어지는 통증이 스며들었다.
“내 결정을 바꿀 사람은 없어.”
진수혁은 다시 못 박듯 덧붙였다.
“그렇다면 우리 이혼해.”
그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도, 더는 함께 있을 수도 없었다.
“걔를 평생 책임질 거라면 차라리 안주인 자리도 넘겨줘.”
일반 부부라면 시부모님께 의논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진수혁과 서지수의 결혼은 애초부터 진씨 집안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경주의 재벌가인 진씨 가문과 파산한 그녀의 가문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가 돈을 들고 도망쳐버리면서 완전히 가치가 없어진 상태였다.
“잘 생각해.”
진수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서지수에게 결혼 생활의 마지막 선은 배우자의 충실함이었다.
“이미 충분히 생각했어.”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순진할 만큼 순종적이던 그녀도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좋아.”
그는 아주 단호하게 동의했다.
너무도 간단히 허락하는 태도에 서지수는 마음이 아팠다. 결혼 한 5년 동안 단 한 번도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걸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그가 베풀어줬던 호의도 그저 일시적인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숨이 막혀 견딜 수 없어, 서지수는 미리 준비해 둔 이혼합의서를 꺼냈다.
사실 세 달 전, 그의 옷에서 여자 향수 냄새가 났을 때 이미 알았어야 했다. 그가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묻은 거라고 했던 것도 단지 핑계였다. 세 달 전 마침 소유리가 귀국했으니 시기상으로도 딱 들어맞는다.
“이건 이혼합의서야. 한 번 봐봐.”
서지수는 그의 눈앞에서 사인한 뒤 서류를 건넸다.
“문제없으면 거기 서명하고 내일 바로 접수하자.”
“네가 이혼하고 나서 감당해야 할 것들이 뭔지 확실히 알아?”
진수혁은 아무렇지 않게 직설했다.
서지수는 손을 서서히 움켜쥐었다.
“나 이미 다 생각했어.”
“지난 5년 동안 넌 일한 적도 없잖아.”
진수혁은 이혼합의서를 들어 올리며 잔인하게 말했다.
“어머님의 비싼 치료비는 어떻게 할 건데? 그건 생각해 봤어?”
그 말을 하며, 진수혁은 합의서를 펼쳤다.
결혼 후의 재산은 절반으로 나누고, 아이의 양육권은 서지수가 가져가는 것으로 쓰여 있었다. 그걸 본 진수혁은 그녀를 재곤하듯 바라보며 낮게 내뱉었다.
“참 대단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