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서지수는 도대체 누구를 건드렸길래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진수혁. 그 외에는 이런 영향력을 행사할 인물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서지수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를 향한 증오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누구세요?”
휴대폰 너머 기계적이고 감정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서지수는 전화를 건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확실히 진수혁의 개인 번호가 맞는데 어째서 비서가 받는 걸까 싶었다.
“저 서지수인데요. 진수혁 좀 바꿔주세요. 용건이 있어서요.”
비서는 사무용 의자에 앉아 있는 진수혁을 힐끗 보았다. 그의 눈짓을 확인하고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진 대표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두 시간 뒤쯤 끝날 예정이라, 혹시 전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가 대신 전해드릴게요.”
“그 사람 지금 옆에 있잖아요.”
서지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진수혁의 개인 번호는 외부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서는 반사적으로 진수혁을 다시 쳐다봤다.
그가 전화를 넘겨받으며 손짓으로 나가 있으라고 지시하자, 비서는 조용히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비서가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너랑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눈치챘어야지.”
진수혁의 목소리는 나른하면서도 차갑게 깔렸다.
“네가 내 취업을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연락할 일 없었을 거야.”
서지수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내면은 끓어오르고 있었다.
“왜 내 구직을 막았어?”
“구직? 무슨 말이지?”
진수혁은 시치미를 뗐다.
“모르는 척하지 마. 네가 회사들에 말해서 넣어 날 떨어뜨리도록 했잖아.”
서지수는 끝까지 추궁하고 싶었다.
“아니.”
그는 생각보다 신속하게 답했다.
“단지, 다른 업체들이 내 체면 때문에 너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은 없도록 했어. 이제 더는 진씨 가문의 며느리가 아니니 봐줘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말은 안 해도 이미 충분한 암시를 줬다는 얘기였다. 경주 상류 사회에서 이런 뉘앙스는 말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그게 재밌어? 정말 이런 식으로 날 괴롭히고 싶어?”
서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혼을 먼저 꺼낸 건 진수혁이고, 그가 바람을 피운 것도 사실인데,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힘들어져야 하는지 말이다.
“뭐라고?”
진수혁은 못 들은 척 되물었다.
“됐어.”
더 대화를 이어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서지수는 전화를 끊으면서 마음 한켠에서 깊은 절망을 느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진수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진심으로 일하고 싶다면, 예전 부부였던 정을 생각해서 내 조건을 조금 풀어줄 수도 있어. 우리 제이 그룹에서 일해보는 건 어때?]
서지수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가 굳이 자신을 제이 그룹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는 뻔했다. 다른 곳에서 문을 막아둔 뒤, 마치 구원의 손길인 양 내 밑으로 들어오라 강요하는 셈이니까.
결국 그녀는 다시 회사 목록을 뒤져봤다. 진수혁과 제이 그룹과 연계된 곳들, 혹은 관계가 깊어 보이는 곳은 전부 제외하자,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중소기업 몇 군데뿐이었다.
어차피 더는 미룰 수도 없으니, 서지수는 그곳들에 새로 이력서를 넣고 방 찾는 일에도 열중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현관 앞에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소유리였다. 혼자 서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가 다가와 길을 막았다.
“얘기 좀 해.”
소유리는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난 불륜녀랑 할 말 없어.”
서지수는 그녀의 손을 툭 밀쳐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소유리는 하이힐을 또각이며 따라붙었다. 이번 시즌 신상 한정판 원피스가 눈에 띄었다.
“이혼할 때, 진수혁이 너한테 한 푼도 주지 않은 건 알고 있어. 지금 당장 돈에 쪼들리는 상황이지?”
말투가 흡사 다 알고 있다는 식이었다.
“네가 진하늘이랑 함께 경주를 떠나 준다면, 이 카드 안의 2억 원을 전부 줄게.”
그녀 말 속에는 새치름한 우월감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