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실로 오랜만에 누르는 번호였다.
“정인아, 나 며칠 뒤에 할리윌로 돌아갈 거야.”
전화가 통하자마자 용건만 짧게 내뱉는 강하나의 말에 이정인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감독님, 3년 만에 드디어 돌아오시는 거예요? 저 지금 일 때문에 잠깐 귀국한 상태니까 시간이랑 날짜 정해지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우리 같이 돌아가요!”
“그래.”
강하나가 통화를 마치고 나니 마침 박지헌이 크루즈 갑판 쪽으로 다가왔다.
박지헌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강하나에게 덮어주었다.
“왜 혼자 나왔어? 바람이 차. 감기 걸리겠다.”
강하나는 그 말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 정신도 차릴 겸.”
“배고프지? 얼른 저녁 식사 준비해두라고 할게. 잠깐만 기다려.”
박지헌은 뒤로 돌아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 강하나를 향한 박지헌의 사랑은 너무나도 유명했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강하나가 감기에 걸렸을 때 박지헌은 국내에서 제일 유명한 의사들을 불러모아 그녀의 감기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옆에서 극진히 케어하게 했다.
그리고 또 하루는 강하나가 한 카페의 컵케이크가 맛있다고 했던 그 한마디로 카페를 통째로 사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 즐기고 있는 이 크루즈 역시 강하나가 며칠 전 휴대폰으로 우연히 검색하며 약 5초 정도 이 크루즈선에 시선이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박지헌이 한 달간 빌린 것이었다.
그때 휴대폰에 알림 소리가 울리고 강하나는 곧바로 최신 기사 내용을 터치했다.
[이정 그룹의 박지헌 대표, 아내를 위해 20억이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크루즈를 한 달간 대여. 박지헌 대표의 아내 사랑은 여전했다.]
박지헌과 그녀의 기사 아래 부럽다는 댓글이 한가득 달렸다.
[역시 돈이 많으니까 아내를 아낄 줄도 아는 거야.]
[여러분 그거 아세요? 박지헌 대표 이번에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는 남자 랭킹에서 1위 했대요!]
[부럽다. 나도 박지헌 같은 남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박지헌을 얻는 대신 수명이 20년 정도 깎인다고 해도 난 박지헌이야!]
...
강하나는 사람들의 댓글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 났다.
그녀는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3년 전 돌연 자취를 감추고 모든 것을 숨긴 채 박지헌과 결혼을 했다.
처음에는 그저 계약으로 맺어진 혼인이었지만 3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지난 후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마음이 생겼다는 알게 된 후 두 사람은 결국 동시에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진정한 부부가 되기로 했다. 그러면서 먼저 변심한 사람이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기로 약속까지 했다.
그런데 반년 전, 무명배우였던 서다은이 이정 그룹에 들어가면서 박지헌은 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보다 훨씬 더 바빠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너무나도 바빠진 나머지 강하나와의 기념일도 챙기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론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박지헌은 여전히 강하나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2개월 전 어느 날 함께 복싱 경기를 보러 갔을 때 강하나가 챔피언의 복싱 글러브가 탐이 난다며 기념으로 가지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복싱 애호가였던 다른 관중이 한발 먼저 글러브를 구매해 버렸고 이에 박지헌은 지불한 가격의 5배를 드릴 테니 글러브를 양도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복싱 애호가는 돈은 필요 없고 대신 챔피언이 된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며 스파링 상대를 해달라고 했다.
말이 스파링이지 분위기상 일방적으로 얻어맞아야 하는 다소 무리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박지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알겠다고 하며 상대를 해줬다.
그리고 얼굴에 피멍이 들고 입으로는 피까지 토해낸 뒤에야 드디어 보상으로 상대방에게서 글러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박지헌은 멍이 다 빠지기까지 거의 한 달 가까이 집에만 누워있어야만 했다. 고작 복싱 글러브 하나 얻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랬던 남자가, 그렇게도 아내 사랑이 지극했던 남자가 설마 변심할 거라고 그 누구 상상이나 했을까.
강하나는 시선을 내려 진정한 부부가 되기로 한날 박지헌과 하이파이브했던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의 온기가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 듯했다.
“자기야, 저녁 준비 다 됐어. 자기가 좋아하는 고등어 조림이야.”
박지헌이 다가와 따뜻하고 커다란 두 손으로 살포시 강하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고등어? 고등어는 어디서 났는데?”
그때 도우미가 다가오며 말했다.
“마침 이 근방에 고등어가 많다고 해서 대표님께서 직접 내려가 잡으셨습니다.”
강하나는 그 말에 그제야 박지헌의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마워. 하지만 위험하니까 앞으로는 이러지 마.”
두 사람에게 앞으로라는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박지헌이 직접 물에 뛰어든 정성을 봐서 그녀는 옅게 웃으며 걱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안으로 들어간 후 박지헌은 고등어 조림을 직접 식탁 위로 옮기더니 이내 강하나의 바로 옆에 앉아 마치 아이에게 이유식 먹이듯 숟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고등어를 대령했다.
강하나가 알아서 먹겠다고 하는데도 박지헌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 와이프한테 내가 먹여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 말에 강하나는 ‘앞으로는 와이프고 뭐고 아닐 테니까’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가 다시 삼켰다.
강하나는 크루즈와 인근 섬에서 일주일 정도만 놀다가 이제는 시시한 듯 박지헌에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크루즈를 세운 섬도 역시 박지헌이 그녀를 위해 한 달간 빌린 곳이었다.
박지헌은 아직 23일이나 더 남은 대여 시간을 아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하나를 꼭 안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알겠어. 자기가 원하면 얼른 돌아가야지.”
그렇게 두 사람의 짧고도 긴 일주일 휴가가 끝이 났다.
그런데 크루즈에서 내려와 대여비를 지불하려는 그때 강하는 우연히 박지헌의 휴대폰 화면을 봤다가 송금처가 서다은으로 된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
그녀는 이 섬의 주인이 한신우였던 걸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소유주가 언제 서다은으로 바뀐 거지?’
대금을 지불하자마자 박지헌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박지헌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 잠깐 당황하더니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강하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스팸이야.”
강하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때 휴대폰이 벨 소리가 또다시 울려댔고 이에 박지헌은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
“받아. 중요한 전화일 지도 모르니까.”
강하나는 말을 마친 후 발걸음을 옮겨 박지헌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에게 충분히 대화할 공간을 주기 위해 말이다.
섬 바로 옆에 서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는데도 강하나의 마음속은 무언가에 의해 꽉 막힌 듯 갑갑하기만 했다.
그때 박지헌이 통화를 마치고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스팸인 줄 알았는데 재단에서 온 거더라고.”
강하나는 박지헌이 요 며칠 재단 설립에 바삐 돌아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고작 재단 관계자의 전화를 받은 것으로 이렇게까지 당황한다는 건 무척이나 수상한 일이었다.
물론 강하나는 그를 추궁하거나 따로 되묻지는 않았다. 앞으로 그의 일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때 박지헌이 뭔가 떠오른 듯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강하나를 바라보았다.
“며칠 뒤면 밸런타인데이잖아. 그때 자기가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줄게.”
이에 강하나가 뭐라 하려는데 그녀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낯선 번호였다.
[일주일 동안 내 섬에서 잘 놀았어요? 남편한테 얘기 못 들었을까 봐 말해주자면 지금 두 발로 딛고 있는 그 섬, 사모님 남편이 나한테 생일 선물로 준 거예요.]
강하나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사람들은 앞에서는 아내만을 위하는 세상 다정한 남편인 척을 하면서 뒤로는 그녀를 위해 대여한 크루즈와 섬값의 100배는 더 되는 가격으로 크루즈와 섬을 구매해 서다은에게 선물이나 하고 있었다.
즉 결과적으로 강하나를 위해 쓴 돈도 결국에는 서다은의 지갑으로 들어갔다는 소리였다.
‘정말 가지가지 하네.’
강하나의 표정 변화에 박지헌이 걱정하며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강하나가 바로 표정을 정돈하며 웃었다.
“그럼 나도 지헌 씨를 위해 밸런타인데이 날 지헌 씨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줄게.”
그녀가 말하는 선물이 며칠 전에 작성 완료한 이혼합의서라는 걸 박지헌은 아직 모르고 있다.
섬에서 나온 후 집에 도착해보니 시간은 벌써 저녁 7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지헌은 강하나를 위해 손수 슬리퍼도 갈아 신겨 주고 또 욕조 물까지 받아놓으며 장미꽃으로 분위기까지 끌어올렸다.
“자기야, 밥부터 먹을래 아니면 먼저 씻을래?”
강하나는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이 여전히 자신을 잘 챙기는 그의 모습에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건 내가 해도 되는데.”
박지헌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의 스킨십에 강하나의 몸이 살짝 얼어붙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