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화
건곤전 내.
태상황이 명원제와 예친왕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힘이 들었는지 모두 내보냈다. 옆에 있던 어의도 내보내고 나니 전 내에는 원경릉과 태상황만 남았다.
명원제가 나가기 전에 의미심장한 눈으로 아무말 없이 원경릉을 훑어 보았다. 건곤전은 고요했으며 감싸고 있는 장막이 두꺼운 것이 바람 한점 통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침대 옆에 서서 무엇을 해야할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태상황이 감고 있던 눈을 번 쩍 뜨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원경릉을 훑어보았다. “앉거라!”그가 소리쳤다. 원경릉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미 자금탕의 효력이 다 떨어진 후인지라 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
“네 죄를 알고 있느냐.” 태상황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원경릉은 태상황이 그녀는 자신을 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속세에 미련이 없지 않는 한 그녀는 그에게 생명을 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들고 “알고 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제 의술이 비록 서투르나 옥체를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원경릉은 수박 겉핥기 식의 대답을 했다.
“너의 의술이 서투르다니, 너는 태의원의 의원들을 모두 돌팔이로 만들 작정이냐!”태상황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경릉은 이 말을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상황이 자신의 의술을 믿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태상황은 원경릉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리 와서 앉거라. 과인에 병에 대해 말해보거라. 이게 죽을 병이냐?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느냐?”
원경릉은 천천히 일어나며 “아직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태상황을 검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라고 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게냐. 진맥을 해보거라.” 태상황은 어디선가 이상한 것을 꺼내 귀에 매달고 있는 원경릉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 먼저 심장 소리를 들어 보겠습니다.” 잠시 후 태상황이 입을 파르르 떨며 “지금 과인에게 뭐하는 짓이냐! 날 얼어 죽일 셈이냐?” 라고 소리질렀다. 원경릉은 청진기를 태상황의 귀에 걸고는 태상황에게 말했다. “쉿, 잘 들어보시옵소서.”
태상황의 노여운 얼굴이 점점 풀리더니 조용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은 과인의 심장 소리인가!”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하옵니다. 심장 소리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염라대왕 곁으로 가시기에는 아직 이른것 같습니다.”
“간도 크구나” 태상황이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원경릉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송구하옵니다.” 라고 말했다.
“됐다. 무릎을 왜 꿇는게야. 앉거라.” 태상황이 소리쳤다. 원경릉은 쓴 웃음을 지으며 “앉기 힘듭니다.”라고 말했다. 태상황은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상처는 다 어디서 나온 것이냐?”
원경릉은 놀랐다. 상처 입은 것을 그가 본 것인가?
“네가 간혹 숨을 들이킬때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너는 내가 귀까지 먹은 것 같으냐? 그리고 네가 과인에 이마에 손을 대었을 때도 손에서 펄펄 열이 나는 것 같더구나.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태상황이 원경릉을 바라보며 물었다.
“넘어졌을 때 난 상처에 염증이 생겨서 열이 나는 것 입니다.” 원경릉은 자신의 처소에서 당했던 암담한 사건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남은 돌볼 줄 알고, 자신은 돌볼 줄은 모르는게냐?” 태상황이 사나운 목소리로 나무라듯 원경릉에게 물었다.
“약 있습니다.”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치료해준 원경릉이 자기 몸 하나 잘 돌보지 못한다니, 태상황이 원경릉의 말을 듣고 눈쌀을 찌푸렸다. 어찌 정후의 딸은 제 마음대로 인건가? 그러나 생각해보니, 이 궁궐 안에 규칙대로 사는 사람이 있기나 한건가?
“약 먹고 쉬고 있어라. 과인은 힘이 부친다!”태상황이 청진기를 빼며 눈을 감았다. 청진기를 챙긴 원경릉은 숨어서 약상자를 뒤졌다. 약상자를 열자마자 원경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수액통이 더 있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럴 시간이 없었다. 해열제와 소염제를 집어 맨입으로 삼킨 후 수액통을 양 손으로 들었다. 태상황이 잠이 들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왜 또 온게냐! 내가 쉬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으냐?”라고 물었다. 원경릉은 조심스레 태상황에게 수액통을 보여주었다. “이게 도움이 될 것 입니다.” 원경릉은 태상황의 눈치를 살폈다.
태상황은 원경릉이 들고 있는 물건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물어볼 힘도 없었기에 보는 둥 마는 둥 원경릉에게 빨리 하고 나가라고 했다. 원경릉은 수액을 놓아 본 경험이 적어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태상황의 혈관은 신기하게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수액을 놓고 고개를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상황과 눈이 마주쳤다. “기운차리시면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원경릉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원경릉은 지금 당장 어찌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 나를 이해시킬 방법을 찾아보거라.”태상황은 말과 동시에 코 고는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원경릉은 수액이 다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누가 볼까 무서워서 황급히 수액통을 없애버렸다.
긴장이 풀린 원경릉에게 온갖 고통이 찾아왔다. 앉아 있지도, 엎드리지도, 배고픈데 무엇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니 죽을 맛이었다. 그녀는 눈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전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태상황도 곧 깨어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책상에 몸을 기댄체 두 손을 베개 삼아 쥐가 엎드린 것 마냥 웅크렸다. 원래는 잠깐 웅크려 쉴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잠이 들고 말았다.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상선이 초왕비 혼자 태상황을 보필하고 있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어 한걸음에 달려왔다. 들어오자마자 원경릉이 이상한 자세로 엎드려 자는 것을 보고 상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초왕비는 믿을 구석이 있기나 한건가. 게다가 잠을 자는 자세도 보기 흉했다.
상선이 그녀를 깨우려고 하자 태상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끄럽다.”
상선은 살금살금 태상황의 침상으로 걸어가 태상황의 이불을 정리하는데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상선은 나가서 저 아이가 먹을 것을 마련해가지고 오너라.” 태상황이 조용히 말했다. 상선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초왕비가 저렇게 흉한 꼴로 잠을 자고 있는데도 태상황이 화는 커녕 먹을 것을 하사하겠다니? 하지만 명을 받들기 위해 상선은 군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원경릉은 저린 팔을 움켜지며 서서히 일어났다. 문득 자신이 잠이 들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 태상황의 침상을 보니 태상황은 아직 깊이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약상자를 꺼내어 큰 바늘을 꺼내 입에 물고 있을 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급히 약상자를 닫아서 주머니 속에 감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상선이 음식을 들고 오고 있었다.
상선은 원경릉이 입에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며 “왕비님……?” 이라고 말했다.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원경릉은 머쓱해하며 상선을 쳐다보았다. 마침 그때, “잘 잤다!” 태상황이 깨어나며 그녀는 한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음식 가지고 오는게 뭐 그리 오래걸리느냐! 저 아이가 배고파서 과인의 신발이라도 먹어버리면 어쩌려고!” 태상황의 말에 상선이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음식을 반상에 올려두었다. “초왕비님 배고프실텐데 드십시오.”
원경릉은 정말 배가 고팠다. 배와 등껍질이 붙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상선이 국을 한그릇을 내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상선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입에 물었던 바늘을 내려놓고 꿀꺽꿀꺽 국 한그릇을 마셔버렸다. 뜨거운 국물이 뱃 속으로 들어가자 온 몸이 따듯해지고 눈에 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상선은 태상황 앞에서 체면없이 허겁지겁 먹는 원경릉을 보고 미간이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