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함부로 나오면 안 돼요
오늘 밤에 일어난 일이 너무 많아 성시연은 단숨에 소화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술을 한 모금씩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이연아가 함께 마셔주려 했지만 그녀가 말렸다.
“넌 안 돼. 만에 하나 심장병이 발작하기라도 하면 나까지 취해서 아무도 너 못 구해줘.”
이연아가 배시시 웃었다.
“우리 성 선생님이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렇게 쉽게 발작하는 병이 어디 있어? 애초에 나 때문에 신경외과 택한 걸 봐서라도 오늘 반드시 함께 술 마셔준다.”
그랬다. 성시연은 애초에 선천성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이연아를 위해 의학을 전공했고 나중에 신경외과로 가게 됐다. 그녀에게 친구란 이연아 한 명뿐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기분이 어떤 건지 뼈저리게 느꼈기에 더는 외롭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연아를 위해 신경외과를 택했다.
그날 새벽, 성시연은 어느덧 인사불성이 되었다. 평상시에 거의 술을 안 마시는 그녀였기에 오늘 밤엔 폭주하다시피 과음했다.
이연아는 그래도 정신줄을 겨우 잡고 있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
성시연이 취기에 비몽사몽 한 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싫어, 너 필요 없어... 강찬우한테 전화할 거야.”
이연아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야, 막말로 너 이거 개 버릇 남 못 주는 꼴이야. 취해서 이 지경이 됐는데도 강찬우 생각이야? 그래, 해봐. 이리로 데리러 오라고 해!”
성시연은 휴대폰 화면의 글자가 잘 안 보여 한참 끄적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그녀가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
“찬우 씨 지금 어디예요? 나 데리러 와요. 여기 지금... 더제로에요. 나 집에 못 가겠어.”
전화기 너머로 진현수가 미간을 찌푸린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옷을 갈아입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기다려. 바로 갈게.”
전화를 잘못 건 게 너무 뻔했지만 진현수는 여전히 그녀가 걱정됐다. 대학교 때 고백했던 그 마음이 아마도 장난은 아닌 듯싶다.
술집에 도착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구석 자리에서 인사불성이 된 두 여자를 발견했다.
그는 얼른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시연아, 나 왔어. 일어나 얼른. 집에 데려다줄게.”
이때 이연아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어? 진현수 씨? 왜 현수 씨가 나왔어요? 우리 시연이 강찬우한테 전화한 거 아니었나요?”
진현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전화 잘못 걸었거든요.”
이연아는 본인조차 몸 가눌 수 없어 성시연을 그에게 맡겼다. 전에 성시연한테서 진현수에 관해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좋으니 당연히 시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현수 씨가 시연이 바래다주세요. 난 괜찮으니 혼자 갈 수 있어요.”
떠나기 전에 그녀는 식상하게나마 협박을 날렸다.
“절대 함부로 나오면 안 돼요!”
진현수는 그녀가 나름 정신이 말짱한 것 같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집에 도착하면 시연이한테 문자 주세요. 내가 대신 살펴볼게요.”
두 여자를 부축하고 밖에 나온 후 진현수는 일단 이연아를 택시에 태워 집에 보냈다. 그는 기사님께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한편 성시연은 완전히 그의 품에 축 늘어졌다. 오랜 시간 지내오며 가장 친밀했던 때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니, 진현수는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성인군자이기에 절대 성시연이 인사불성인 틈을 노릴 리가 없다.
“시연아, 내가 강씨 저택까지 바래다줄게.”
성시연은 그의 말이 어렴풋이 들렸지만 누군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혀가 꼬인 채 혼잣말로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싫어, 나 안 가. 거기 보내지 말라고. 그 사람은 나 싫어해. 나만 보면 화낸단 말이야...”
그녀는 완전히 취해버렸다. 강찬우가 집에 없다는 것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뼛속 깊이 묻어둔 속마음이었다.
진현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오매불망 그려도 얻지 못하는 여자가 정작 강찬우 앞에서는 이토록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는 말인가?
사심이든 뭐든 그는 오늘 반드시 성시연을 제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