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강다인이 기다리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 김지우가 뒤늦게 도착했다.
그녀는 허둥지둥 뛰어와 연신 사과했다.
“미안해요, 오빠들이랑 경기에 대해 의논하다가 시간을 깜빡했어요.”
강하늘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아. 너도 집에 보탬이 되려고 그러는 건데 적어도 배은망덕한 사람보다 낫지 않겠어?”
박정남도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이따가 최대한 빨리 밟으면 돼요.”
하지만 결국 지각은 면치 못했다.
두 여자가 교실 입구로 뛰어가던 중 마침 담임 선생님 나유빈의 눈에 띄었다.
김지우는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헐떡였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다인 언니도 지각하게 되었어요.”
강다인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유빈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활짝 웃으며 김지우를 향해 말했다.
“알았어. 그렇게 꼬치꼬치 설명 안 해줘도 돼. 먼저 들어가 봐.”
“감사합니다.”
강다인이 따라가려는 찰나 귓가에 나유빈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김지우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다음부터 절대로 봐주지 않을 테니까.”
강다인은 고개를 돌렸다.
“방금 김지우가 자기 때문에 지각했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그만! 네가 평소에 어떤 사람인지 선생님이 모를 것 같아?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수업할 때 복도에 서서 들을 줄 알아.”
안 그래도 한참 뒤처져 있는지라 그녀는 수업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결국 기분이 바닥을 친 상태에서 조용히 교실로 들어섰다.
지금은 얼른 시험이 끝나서 하루라도 일찍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점심시간.
김지우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였고, 프로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를 바라보며 하나같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껌딱지 박지민이 강다인을 향해 눈짓했다.
“누군가 널 질투하는 마음에 일부러 시간을 지체해서 지각했나 본데?”
김지우는 웃기만 할 뿐 굳이 설명을 보태지 않았다.
정작 강다인은 그들을 무시한 채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방과 후, 김지우는 일부러 우쭐거리며 강다인에게 말했다.
“오늘도 트레이닝 캠프에 가야 해.”
강다인은 조용히 교과서를 챙겨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김지우는 강다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박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숙제 좀 부탁할게. 선생님께 들키면 안 돼.”
“걱정하지 말고 트레이닝 캠프에 가서 열심히 해. 우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테니까.”
“고마워, 너희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할게.”
김지우는 홀가분하게 떠났다. 이번에는 반드시 강다인을 짓밟아 자신이야말로 강씨 가문의 여동생으로서 제격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리라 맹세했다.
...
강다인은 책가방을 메고 곧장 보건실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석훈의 다정한 얼굴에 언뜻 장난기가 엿보였다.
“무슨 일이죠?”
“아, 숙제하러 왔는데 잠깐 있다가 가도 되죠?”
강다인은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왔고 쫓겨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낯가림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이석훈은 은근히 놀랐다.
워낙 겁이 많고 소심한 친구라 다시는 찾아오는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석훈에게 과외를 받을 때 역시나 꾸중을 들었다.
“머리가 왜 이렇게 단순해요?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밖에 모르다니. 앞으로 간단한 문제는 묻지 말고 알아서 해결해요.”
강다인은 차마 한 글자도 반박하지 못하고 알려주는 대로 고분고분 메모했다.
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다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까 빵을 하나 먹었더니 결국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이석훈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배달 음식을 주문했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맞은편에 앉은 강다인은 남자의 손목에 생긴 흉터를 바라보더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언제 사고당했어요? 심하게 다쳤나요?”
이석훈은 아무 말 없이 도시락 뚜껑을 열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강다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딘가 흐릿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꽤 오래됐어요.”
“저도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오빠들이랑 살게 되었죠.”
그동안 오빠들에게 의지했던 나날이 떠오르자 강다인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오빠들과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나름대로 사이는 돈독했다.
하지만 김지우가 나타난 이후로 모든 게 변했다.
이석훈은 젓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앞으로는 무슨 계획이죠?”
“운성대학교에 갈 생각이에요. 이 도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해요.”
“목표가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지금 성적으로 운성대학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최선을 다해 보려고요.”
이석훈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떨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간단한 문제는 물어보지 마요!”
강다인이 피식 웃었다. 뜻인즉슨 앞으로 계속 질문해도 된다는 것인가?
그 뒤로 강다인은 방과 후 보건실에 남아 숙제를 마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반면, 김지우는 트레이닝을 받느라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 하고 심지어 잠을 자기도 했다.
물론 선생님이 가장 아끼는 학생으로서 컨디션이 안 좋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눈감아 주었다.
강다인은 김지우의 인스타에 올라온 트레이닝 캠프 사진을 발견했다. 그리고 게임에서 오빠들과 나란히 싸우는 동영상도 있었고 닉네임마저 통일했다.
물론 이름들이 전생과 다를 바 없지만 단지 그녀만 참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숙제를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게임부터 하면 어떡해요?”
이석훈이 다가와 그녀의 휴대폰에서 재생되고 있는 게임 영상을 내려다보았다.
강다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인스타에 뜨니까 보고 있었어요. 지금은 저한테 공부가 우선순위예요.”
“다음 주 월말고사에서 100등 안에 들면 게임을 하게 해줄게요.”
강다인이 고개를 젖히고 활짝 웃었다.
“그럼 선생님도 같이하는 거예요?”
그녀는 이석훈도 같은 게임 유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이석훈의 옆모습은 훈훈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내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오랜만에 하는 거라... 일단 다인 학생이 100등 안에 들면 다시 얘기해요.”
“약속 어기면 안 돼요.”
강다인은 이석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100등 안에 들겠다고 다짐했다. 어쨌거나 그는 예사롭지 않은 실력의 소유자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도 전생에 게임을 잘했다.
어쩌면 나중에 게임에서 이석훈을 압살해 조금이나마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머릿속을 문득 스쳐 가는 생각에 기대감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숙제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거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는 둘째 오빠 강서준을 발견했다.
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단 말이지?
그동안 오빠들도 트레이닝 캠프에 들락거리느라 대부분 밤늦게 귀가했다.
강서준은 고개를 들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갔다가 이렇게 늦게 들어오는 거야?”
강다인의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숙제하러 보건실에 갔다는 것만큼은 절대로 들킬 수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안식처마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독서실에 다녀왔어. 사람이 많아서 공부하는 분위기가 나거든.”
“가방 줘 봐.”
이내 책가방을 건네주자 강서준이 노트를 펼쳐 보았다. 빼곡히 적힌 메모와 오답을 발견하고도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환이 요즘 그녀가 밖에서 무엇을 하는지 항상 집에 늦게 돌아온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진짜 공부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강서준은 책가방을 내려놓았다.
“다인아,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눈앞에 얌전히 서 있는 강다인을 보자 문득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지 콕 집어 얘기하기는 힘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속상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심지어 고자질까지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점점 더 제멋대로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강서준이 입을 열었다.
“요즘 지우가 실력이 많이 늘었어. 너도 트레이닝 받으면 일취월장할 거야. 워낙 재능이 있으니까 가끔 트레이닝 캠프에 오는 게 어때? 어차피 공부에도 지장이 없을 테고 가족끼리 오붓하게 보낼 수도 있잖아. 형도 돌아와서 동생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기뻐하지 않겠어?”
고개를 숙인 강다인의 눈빛에 조롱이 가득했다.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크루에 합류할 생각이 없어.”
“강다인, 김지우는 강씨 가문의 일원이야. 물론 너도 마찬가지이고. 가족을 챙겨줘야지 외면하면 되겠어? 어쨌거나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딸인데.”
강서준은 당최 이해가 안 갔다. 그렇게 많은 기회를 줬는데 왜 잡을 줄 모른단 말이지?
김지우를 챙겨준 이유도 강다인 대신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거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공기마저 탁하게 느껴져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강다인은 주먹을 꽉 쥐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았다.
‘젠장!’
이내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김지우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쳐야 만족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