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16번 배드 이진아 씨, 아직도 생각나는 거 없어요? 입원하신 지 벌써 사흘이나 됐어요. 얼른 보호자분더러 와서 병원비 수납하라고 하세요.”
이진아가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간호사에게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휴대폰 잠금 비밀번호가 도무지 기억이 안 나서요.”
“비상 연락망에 등록된 연락처는 없어요?”
“그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병실 문을 걷어찼다. 잘생긴 젊은 남자가 짜증 섞인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대체 몇 번째야.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수아 꼬드겨서 데리고 나가더니 교통사고나 내고. 수아가 운이 좋았길래 망정이지, 하마터면 너 때문에 얼굴이 망가질 뻔했어. 이진아, 파혼하자, 우리. 그리고 나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지도 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널 좋아하는 일은 절대 없어.”
강서준의 뒤에 있던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빠, 난 괜찮아요.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다친 곳도 다 나았으니까 그만해요. 앞 유리창이 깨지면서 얼굴에 박히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안 그러면...”
이진아는 막연한 눈빛으로 붕대를 감은 머리를 더듬거렸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간호사가 그녀에게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가족들이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강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이 잘생겨 깔끔한 양복을 빼입으니 더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품에는 이수아를 안고 있었다.
“이진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수아야. 너랑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긴 했지만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5년 동안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게 지겹지도 않아? 네가 날 쫓아다니는 바람에 수아는 자기 마음도 드러내지 못했어. 오늘 확실히 말해 두는데 네가 아무리 잘해줘도 눈에 차지 않아. 나랑 수아는 이미 갈 데까지 갔고 절대 수아를 버리지 않을 거야.”
이수아는 감격한 표정으로 그의 팔짱을 끼더니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서준 오빠...”
이진아가 시선을 늘어뜨렸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심장을 칼로 도려내듯 아파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동안 억눌렀던 서러움이 한순간에 밀려와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애써 참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난 당신들 몰라. 근데 남자 친구가 있는 것 같기는 해. 혹시 그 사람 전화번호를 알면 연락 좀 해줄래?”
남자 친구라는 존재가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강서준의 두 눈에 의아함이 스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차갑게 웃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마침 벽에 걸린 TV에서 경제 뉴스가 나왔다. 강인 그룹 최연소 후계자 강현우가 귀국했다는 소식이었다. 강현우가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얼굴 반쪽이 망가져 사람들 앞에 나서길 꺼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강서준이 TV를 가리켰다.
“지금 TV에 나오는 저 사람이 우리 삼촌 강현우인데 네 남자 친구야. 번호 줄 테니까 알아서 연락해봐.”
그러더니 이진아의 휴대폰을 능숙하게 잠금 해제하고 전화번호를 남겼다.
옆에 있던 이수아가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속삭였다.
“오빠, 괜찮겠어요? 2년 전에 언니 때문에...”
이수아의 허리를 감싸 안던 강서준의 두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
‘5년 동안이나 매달리던 여자를 이렇게 쉽게 놓아주면 재미없지. 밀당 좀 해야겠어. 남자 친구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전에 제일 싫어했던 강현우를 만나게 하는 게 좋겠어.’
“우리 삼촌 연락처야. 이번엔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연기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 앞에 무릎 꿇고 빌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