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차에서 내리기 전 나는 오영은의 입에서 이번에 이 거물을 만날 기회는 어젯밤 양주 두 병은 들이켜고 겨우 얻어낸 기회라는 것을 듣게 됐다.
사업을 할 때면 오영은은 늘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알았다.
솔직히 최근 몇 해간 나 역시도 가끔 경제 신문에서 주한준의 모습을 자주 봤었다. 안목이 높다느니, 불패의 업적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특히 반년 전에 한 IT 공장을 인수한 케이스는 업계에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기도 했다.
지난날 경제금융학과의 엘리트가 금융권의 루키로 떠오른 것은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젯밤 그가 동창회에서 모두의 추대를 받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이 드러낼 수 없는 전 애인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했지만 오영은의 얼굴의 두꺼운 화장을 본 나는 두 눈을 꾹 감은 채 빌딩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작은 게임 스튜디오인데 주한준이 직접 상대를 할 시간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회의실 안, 번듯하게 차려입은 책임자 세 명이 쪼르륵 앉아 인내심 있게 나와 오영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질문하고 대답하고 모든 절차를 마치자 이미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중 한 책임자는 우리를 아래까지 바래다주었다. 오영은은 익숙하게 그와 식사약속을 잡고 있었고 나는 옆에서 웃으며 맞장구나 치고 있었다.
별안간 귀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진아 선배, 진짜로 선배네요?”
등을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주한준과 임지아가 보였다.
주한준은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딱 맞게 재단된 정장은 그를 더욱 거대하고 우람해 보이게 했고 그 완벽한 옆얼굴과 선명한 이목구비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옆에 있는 임지아는 블루 컬러의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 차림을 하고 있어 앳되고도 귀여워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한준 손목의 블루 다이아몬드 커프스는 마침 임지아의 블루 다이아 귀걸이와 마침 한 쌍같이 보였다.
몹시 잘 어울렸다.
만약 주한준의 두 눈에 스친 불쾌함을 무시한다면 말이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임지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나의 얼굴로 향했다.
“선배, 프로젝트 때문에 온 거예요?”
똑똑하기도 했다.
오영은은 빠르게 이상함을 알아채고는 앞으로 다가가 주한준에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주 대표님, 진아한테서 말씀 많이 들었는데 오늘 드디어 직접 뵙게 됐군요.”
그 말은 오영은이 자주 하는 말이었지만 오늘은 아마 상대를 잘못 만난 듯했다.
역시, 주한준은 담담하게 그녀를 흘깃 보더니 오영은을 넘어 시선을 내게로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요?”
명백히 비웃는 말투였다.
어젯밤 자신만만하게 했던 말이 떠올라 어딘가로 숨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선배,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임지아는 열정적으로 굴며 물었다.
“저희 회사 점심 맛있기로 엄청 유명한데, 드시고 가실래요?”
나는 그제야 주한준이 이미 임지아를 그의 회사에 꽂아줬다는 걸 알아챘다.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대학 4학년생에게는 엄청나게 귀한 기회였다.
주한준은 벌써부터 그녀를 저토록 보호하고 있었다.
그걸 보자 부끄러움을 무릅 쓰고 도서관에 그를 찾아갔어도 그저 맞은편 자리에만 앉을 수 있었던 과거가 문득 떠올랐다.
마치 도도한 그의 이미지에 조금이라도 오점이 생길까 걱정하는 듯한 태도였었다.
그리고 당시의 나는 그걸 자랑스러워하며 그게 뭐 특별한 명예라도 되는 줄 알았었다.
“괜찮아요.”
나는 나의 목소리를 찾으려 애를 쓰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일이 더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말을 마친 나는 오영은에게 눈짓을 했지만 오영은의 답답하다는 표정을 발견했다.
차에 타자 오영은은 차가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설명 좀 하지?”
“우리한테 투자 안 할 거예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괜히 허튼 고생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미간을 찌푸린 오영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떡하니 벌렸다.
“설마 진아야, 네 그 쓰레기 전남친이… 주한준인 거야?”
결국은 들켰다.
“망했다.”
오영은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만약 주한준이 우리 사업 제안서를 보게 된다면….”
나는 오영은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경제금융학과의 남신인 주인공은 캐릭터 설정이 호구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주에게 잘해주고 호구짓을 해도 여주를 얻을 수 없는 그런 설정이었다.
프로젝트의 전망이 걱정이었다.
난 지금 주한준이 그저 단칼에 거절해 사업 제안서 같은 건 보지도 말고 쓰레기통에 집어넣기를 바랄 뿐이었다. 적어도 일부러 트집 잡힐 건덕지는 없길 바랐다.
현재 투자 업계에서의 주한준의 위치를 생각했을 땐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우린 정말로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었다.
이건 이미 빚이 산더미인 우리에게 있어선 설상가상의 상황이었다.
평온하게 오후를 보낸 나와 오영은은 점차 이성을 회복했고 계속 투자자를 찾기로 결정했다.
밤 9시, 피곤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멀리서부터 한 사람을 발견했다.
어두운 복도에서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서 있었다. 얼굴은 어둠속에 숨어 있었지만 손가락 끝에는 붉은 기가 드러나 있었다.
주한준이었다.
인기척에 불이 밝혀졌고 나와 주한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주변에 매캐한 담배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그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연이야.”
주한준은 아무 말없었다.
소리없는 압박감이 나를 덮쳐와 나는 계속해서 해명했다.
“이미 다른 투자자를 찾고 있으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주 대표님.”
개인적으로는 주한준에게 밉보이는 게 두렵지는 않았지만 회사 생각도 해야 했다.
아니나다를까, 내 말을 듣자 주한준의 온 몸에서 뻗어나온 분노가 순간 조금 옅어졌다.
나는 아무 말없이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예상치 못한 주한준의 말이 들려왔다.
“프로젝트, 우리가 투자할 수 있어.”
나는 순간 멈칫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보아하니 이미 사업 제안서를 본 듯했다.
하지만 왜?
주한준은 이보다 큰 프로젝트도 많았고 정말로 투자를 하려한대도 오영은에게 연락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귀찮게 여기에 서 있는 걸까?
고개를 숙인 나는 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왠지 일이 마냥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이내 주한준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조건이 있어.”
내 예상이 맞았다.
주한준과 시선을 마주한 나는 인사치레를 건넸다.
“말씀하시죠, 주 대표님.”
“지아의 졸업 작품에 프로젝트 하나가 필요해. 이번 게임에 지아도 참여할 수 있었으면 해.”
우리 모든 사람들의 심혈로 임지아를 포장하려는 거였다.
주먹을 말아쥐었던 나는 이내 손을 펴며 말했다.
“내일 아침 오 사장님께 보고하도록 하죠.”
난 그저 기술자로 입사한 거라 개인적인 이유로 주한준이 내민 손길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내가 이토록 담담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담담하게 나를 본 주한준은 짧게 대답했다.
보통 저런 표정을 지으면 담판은 끝이 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눈치껏 아무 말없이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밖으로 발걸음 소리가 점차 사라졌다. 쭈그려앉은 나는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영한 그룹이 투자를 하려 한다는 소식을 오영은에게 전했다.
놀라 넋을 뺀 오영은은 한참이 지나 물었다.
“쓰레기도 인맥은 인맥이구나.”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내 주한준이 말한 조건을 이야기했고 그것을 들은 오영은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백평짜리 넓은 아파트에 클럽의 잘생긴 남자들 생각하면 이 돈, 벌어야 해.”
나는 사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려진 밥상은 먹어야죠.”
그리하여 나와 오영은은 다시 한번 영한 그룹으로 향했다.
이번에 프론트 직원은 우리를 곧장 최고층의 대표 사무실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방울 굴러가는 듯한 여자의 웃음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시선을 들자 임지아가 주한준의 곁에 얌전히 앉아 호탕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리가 들어오자 그녀는 곧바로 주한준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으며 부끄러운 듯 얼굵을 붉혔다.
“전 먼저 나가있을 거요.”
“안 그래도 돼.”
임지아를 불러 세운 주한준의 시선이 나와 오영은의 얼굴로 향했다.
“새 동료들한테 인사해.”
“새… 새 동료요?”
예쁜 두 눈에 의아함이 스치더니 이내 서러움 가득한 표정을 한 임지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제가 멍청해서 그러는 거예요?”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준이 조금 화를 내며 대답했다.
“졸업 작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이제 생겼잖아.”
임지아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영은이 적당한 타이밍에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맞아요, 임지아 시. 저희 <럽 앤 딥> 패밀리에 오신 걸 환영해요.”
임지아는 기쁜 얼굴로 주한준을 보더니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빠, 저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에요?”
이 서프라이즈에 임지아는 몹시 감동한 게 보였다.
나도 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6년을 떠올려보면 나도 주한준에게 기념일이나 생일 파티 같은 각종 서프라이즈를 준비해 주었었다. 그것도 몹시 기뻐하면서 말이다.
지금 주한준도 나름 제대로 배운 셈이다.
다만 주한준의 모순된 행동에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하지만 그런 건 돈 앞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 없었다.
주한준은 10억을 투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