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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사무실 안, 맞은편에 앉은 주한준이 단독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꽤나 평온한 목소리였지만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듯한 그의 태도와 아우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심장을 꽉 그러쥐는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대체 얼마나 급했으면 영한 그룹에서 여기까지 와서 임지아 대신 나서주는 건가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을 시킨 것이 아니라 직접 달려온 것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말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대표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주한준은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작은 실수였을 뿐입니다. 좋은 팀이란 팀원의 실수도 너그럽게 받아줘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게다가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어린 직원이지 않습니까.” 작은 실수라.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한 달 동안 쏟아낸 피땀 어린 결과물이 주한준한테는 그저 작은 실수였을 뿐이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껴버렸다. 나는 갑자기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주한준에게 온갖 아부를 다 떨고 있었을 때 좀 더 그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에 그의 옷을 세탁해주려고 한 나는 스웨터를 잘못 세탁해 버려서 그의 옷이 전부 망가졌었다.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땐 일주일 내내 나랑 말을 섞지도 않았었는데. 대답이 없는 나를 발견하자 주한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공부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도록 하죠. 남 팀장님도 좀 더 인내심 있게 대해주세요.” 다시 들려오는 말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무려 6년 동안 그의 곁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인내심이 없다는 평가를 들어버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나는 강하게 올라오는 불편함을 억누르며 말했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그의 검은 눈동자는 올곧게 내 얼굴을 향했다. 주한준은 덧붙여 물었다. “남 팀장님 혹시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까?” 마치 재판의 판사처럼 우리에게 이미 형량을 다 내려줬으면서 왜 다시 의견을 묻는 건지 난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난 겨우 얻어낸 투자금을 생각하면서 주한준의 시선을 마주치며 공손하게 말을 꺼냈다. “아니요, 좋은 것 같습니다.” 주한준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더니 피식 한 번 웃고는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다. 나는 기계적으로 엘리베이터까지 그를 배웅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재빨리 벽을 짚고 서서 가쁘게 숨을 골랐다. 입안에는 쓴맛만이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지아에게서 카톡이 하나 왔다는 알림이 떴다. “선배, 저 열심히 할게요. 선배랑 한준 오빠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채팅창을 닫고 계속 코드를 작성했다. 이튿날, 임지아는 확실히 그녀가 말한 대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답지 않게 야근까지 자처하면서 말이다. 나는 속으로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다. 밤 9시, 나는 꼬르륵 울리는 배를 안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컵라면을 챙겨 탕비실로 향했다. 컵라면에 물을 다 받자 문쪽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쪽을 향해 바라봤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주한준이 문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의 손에는 정교하게 포장된 도시락이 들려있었고 그 위에는 유명한 레스토랑의 로고가 박혀있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컵라면과 아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물었다. “지아는 어디 있죠?” 소리를 들은 임지아는 사무실에서 나와 기쁜 얼굴로 주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안 와도 된다니까요. 바쁜데 제가 방해한 거 아니에요?” 주한준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배고프지, 일단 먹자.”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배고픈 거 같기도 하네요.” 말을 마친 임지아는 주한준의 팔짱을 끼고 사무실로 향했다. 그렇게 몇 발자국 걷다 다시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은 내 손에 들려있는 컵라면을 향했다. “선배, 왜 컵라면을 드세요. 도시락 같이 드실래요?” 호의로 물어본 것임을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은 저도 모르게 조여들었다. 지금 컵라면을 먹어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괜히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는 툭하고 쏘아붙였다. “괜찮아요. 난 그렇게 비싼 입맛이 아니라서.” 그 말을 들은 임지아는 걸려있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상처받은 고양이처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선배, 제 뜻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녀 옆에 있던 주한준은 미간을 좁히더니 정색해서 말했다. “남 팀장님, 지아도 호의로 물어본 겁니다.” 호의. 뭐, 온갖 사랑과 예쁨을 다 받고 있는 공주님이 거지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모습은 왕자님에겐 아주 굉장한 선의의 행동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거지의 자존심 따위에 관심이 있을까? 나는 갑자기 내가 너무 속 좁게 굴었다는 것을 의식해 버렸다. 투자자랑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일의 한 부분이니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컵라면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요즘 제가 입맛이 없었는데 오늘은 매운 게 좀 당기네요.” 임지아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네요. 이 레스토랑 음식들은 좀 담백해서 입맛에 안 맞으시겠다.” 이 핑계라면 어찌어찌 설득이 될 것 같았다. 상황은 해프닝으로 넘어갔지만 컵라면은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끼니는 때워야 했으니 꾸역꾸역 먹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속이 불편 해났다. 위가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말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잠시 후 위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이곳저곳에서 내 신경을 자극했다. 어느새 난 식은땀으로 젖어버렸다. 나는 위약을 꺼내 배를 부여잡고 탕비실로 갔다. 정말 너무 아팠다. 컵을 들 힘조차 없을 정도였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에 들려있던 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밀려오는 고통을 참고 겨우 한 발자국 내디뎠지만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바닥으로 넘어지려 했다. 그러자 땅에 널린 유리조각들이 생각나 난 두려움에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예상한 것처럼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힘 있는 팔이 내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안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훅 밀려들어오는 익숙한 비누향에 순간 나는 오래 전의 뜨거웠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생생한 감각이 드는 포옹이었다. 의아할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했다. 천천히 눈을 뜬 나는 주한준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쳐버렸다. 천장에 달려있는 형광등 아래 남자의 눈은 가늘고 몽롱한 흰색 베일이 씌워진 것처럼 그 사이로 부드러움과 걱정이 드러났다.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그제야 나는 자신이 주한준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입을 열고 대답을 하려던 순간 임지아의 달콤한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오빠, 지금… 뭐해요?” 나는 아픔을 참고 주한준의 품에서 벗어난 뒤 일부러 더 공손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주한준은 임지아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남 팀장님이 몸이 안 좋아서 아까 쓰러질 뻔한 거 잡아준 거야.” 그는 그녀에게 해명을 하고 있었다. 임지아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럼 저희 진아 선배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건 어때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인사치레일 뿐이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팔로 싱크대를 짚고 서서 자꾸만 몰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눈치 빠르게 핑계를 댔다. “생리통이에요. 약 먹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자 임지아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주한준이 오히려 덧붙였다. “지금 혼자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데. 병원에 가서 검사라도 받죠.” 그의 태도는 꽤나 단호했다. 마치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반적이지 않은 반응이었다. 임지아도 느꼈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소심한 눈빛으로 주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되게 세심하시네요, 오빠.” 그 말에 주한준은 멈칫하더니 나에게 눈길을 주고는 성큼성큼 임지아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손을 잡고 탕비실을 나갔다. 어린 아가씨를 달래러 가는 것 같았다. 그 틈을 타 나는 위약을 삼키고 잠시 숨을 고른 다음 탕비실을 나섰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주한준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남 팀장은 이 프로젝트 책임자잖아.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내년 네 졸업논문에도 영향이 가는 거니까.” 나는 차가운 얼음물을 머리에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주한준이 날 도와줬던 건 그저 프로젝트 책임자인 내가 임지아의 졸업에 민폐가 될까 봐 그랬을 뿐이었다는 걸 난 그제야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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