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잠깐 고민하던 이태호는 결국 문 앞에서 서서 가볍게 노크했다.
“누구세요?”
예쁜 여자는 노크 소리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문 앞에 섰다.
그녀는 사색에 잠긴 얼굴로 이태호를 자세히 살폈다.
“안녕하세요, 누구시죠?”
이태호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흠집이라고는 전혀 없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하하, 절 찾으러 오신 건 그쪽이잖아요? 누구냐니, 그 질문은 제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상대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놓으며 팔짱을 둘렀고 미소 짓는 얼굴은 아주 아름다웠다.
이태호는 미간을 구겼다.
“아, 전 이태호입니다. 당신이 누군지 궁금했습니다. 왜 저희 부모님을 도와주고 계시는지도요. 제 친구라면서 매달 저희 부모님께 돈을 보내셨더군요. 전 당신 같은 친구가 기억에 없는데 말이죠!”
이태호는 눈앞의 여자가 어쩐지 눈에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도저히 상대방이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물어볼 셈이었다. 어쩌면 고등학교 동창일지도 몰랐다. 몇 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해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정상이었으니 말이다.
눈앞의 미인은 자신의 눈앞에 선 남자가 자신을 이태호라고 소개하자 순식간에 미소가 굳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약간의 노여움이 보였다. 그녀는 눈시울이 빨갛게 되었고 눈물이 당장이라도 넘쳐흐를 것 같았다.
여자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눈을 떴다.
그녀는 이태호를 뒤로 살짝 밀치면서 문을 나섰고 집 안에 있는 은재에게 말했다.
“은재야, 엄마 잠깐 볼일 있어. 이 아저씨랑 얘기 좀 나눠야겠어!”
말을 마친 뒤 그녀는 방문을 닫았다.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
여자의 반응에 이태호는 어리둥절해졌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언제 그녀를 만났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가 왜 자신을 죽일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하하, 이렇게 일찍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요. 난 그래도 5년 뒤에나 나올 줄 알았는데!”
여자는 자조하듯 웃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이태호의 뺨을 때렸다.
“쓰레기 같은 놈!”
조건 반사처럼 이태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우리가 언제 만났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 이태호는 절대 쓰레기 같은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을 잘못 알아본 건 아닙니까?”
“당신이 맞아요. 내가 재가 되더라도 당신은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여자는 이태호에게 잡혔으면서도 죽어라 이태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이 나 신수민의 인생을 망쳤어요! 당신이 없었다면 내 인생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무책임한 자식!”
“신수민?”
이태호는 그 이름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그녀와 알게 됐는지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은 눈에 익었다.
“전 당신을 알지 못해요.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제 친구 중에,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신수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어요.”
이태호는 여자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그동안 저희 집안을 도와주셨죠. 말씀하세요, 얼마예요? 제가 돌려드릴게요!”
“하하, 우습네요, 참 우스워요!”
신수민은 실망한 얼굴로 웃기 시작하더니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태호, 이 망할 자식. 돌려준다고요? 어떻게 돌려줄 건데요? 뭐로 갚을 건데요? 내 청춘, 그리고 내가 그동안 당했던 억울함을 무슨 수로 갚을 거냐고요!”
이태호는 어이가 없었지만 여자가 아주 괴로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가짜가 아니었고 연기도 아니었다.
“당신 너무 흥분한 것 같네요. 지금은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냉정을 되찾은 뒤에 다시 얘기해요.”
이태호는 상대를 힐끗 보았다.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결국 자리를 떴다.
“흑흑!”
이태호가 떠난 뒤 신수민은 바닥에 주저앉아 무기력하게 울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방문이 살짝 열렸다. 여자아이가 천천히 방문을 연 뒤 고개를 내밀었다.
울고 있는 신수민의 모습에 은재는 방에서 나와 신수민의 앞으로 작은 손을 내밀었다.
“엄마, 왜 울어요? 조금 전 그 아저씨가 엄마를 괴롭혔어요? 엄마, 울지 마요, 엄마...”
은재는 말하면서 점차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울기 시작했다.
신수민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은 뒤 신은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은재야. 엄마 안 울어. 그러니까 은재도 울지 마, 응?”
“네!”
신은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재야, 정말 아빠가 무척 그리워?”
신수민은 눈앞의 귀여운 딸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신은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아빠가 있어요. 은재도 아빠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은재는 말괄량이가 아니에요!”
그 말을 들은 신수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내쉬더니 신은재에게 말했다.
“은재야, 이렇게 하자. 넌 먼저 들어가서 TV 보고 있어. 아빠 이제 곧 돌아오실 거야. 엄마가 가서 아빠 데려올게. 그러면 함께 생일 보내자. 같이 케이크도 먹고, 좋지?”
“진짜예요?”
신은재는 그 말에 크고 귀여운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아이는 신난 얼굴로 손뼉을 치면서 뛰기 시작했다.
“좋아요, 좋아요. 아빠 곧 돌아와요? 아빠가 인형 사주실까요? 엄마!”
“그럼. 인형을 아주 많이 사 오실 거야!”
신수민은 마음이 저렸다. 그녀는 줄곧 딸을 속이고 있었다. 아빠가 돈 벌러 먼 곳에 갔다고, 돌아온다면 아이에게 인형을 많이 사줄 거라고 했다.
은재는 아빠가 옆에 있어 주길 진심으로 기대하는 듯했다.
“그럼 은재는 집에서 TV 보고 있어. 엄마는 아빠 마중하러 갈게!”
신수민은 신은재를 위해 TV를 켰고 문을 닫은 뒤 외출했다.
“신수민, 신수민? 세상에, 대체 누구지?”
이태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길을 걷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신수민이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이태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미친 여자는 아니겠지?”
“이태호?”
그런데 뜻밖에도 바로 그때, 아우디 A4 한 대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차창이 내려지자 단발머리 여자가 고개를 내밀며 이태호를 보았다.
“이태호, 정말 너였어?”
“김지영?”
이태호는 당황했지만 이내 그녀가 자신의 대학 동기 김지영이라는 걸 떠올렸다.
운전하던 남자도 고개를 돌려 이태호를 향해 웃었다.
“하하, 이태호, 오랜만이다. 네 일로 우리 반이 꽤 떠들썩했어. 생각도 못 했다. 우리 반에서 그렇게 우수하던 학생이 감옥에 갈 줄은. 그런데 의외로 빨리 나왔네! 감옥에서 성실하게 지내서 감형받은 거겠네.”
말을 마친 뒤 남자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5년쯤 됐겠네. 쯧쯧, 5년이라니, 정말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가네. 참, 콩밥은 어땠어? 우리 반에서 콩밥을 먹어본 건 너밖에 없잖아. 어땠는지 우리한테 얘기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