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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무영 교도소 입구. 한 노인이 부의 상징인 블랙카드를 쥔 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조태풍, 자산 가치가 수조를 넘나드는 태영 그룹의 창시자였다. 기업이 한창 주가를 올리는 와중에 수장인 그는 얼마 전에 시한부 진단을 받았다. 전 세계를 샅샅이 뒤지며 명의와 치료방법을 찾았지만 돌아온 답은 앞으로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싸늘한 대답뿐이었다. 그러다가 어제 무영 교도소에 대단한 의사 한 명이 그와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환자를 치료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곧장 2천억의 거금을 준비해서 부랴부랴 이쪽으로 달려오게 된 것이다. 철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교도관이 그에게 말했다. “조 회장님, 그분께서는 금방 출소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 길입니다. 지금 이쪽으로 가시면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끼익! 철문이 열리고 이장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는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양팔을 쭉 뻗으며 오랜만에 되찾은 자유를 한껏 만끽했다. ‘드디어 나왔네.’ 3년 전, 그는 아내의 죄를 뒤집어쓰고 그녀를 대신해 감방에 들어왔다. 배정받은 방에는 치매기가 있어 보이는 한 노인이 있었는데 어깨가 뻐근하다면서 같은 방 사람들에게 수시로 마사지를 요구했다. 감방 동기들은 못 생긴데다가 멍청해 보인다며 노인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다. 이장훈은 아버지뻘 되는 노인이 안쓰러워 먼저 다가가서 마사지를 해드리겠다고 청했다. 노인은 꽤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는 이장훈에게 마사지 기법을 가르쳐줄 테니 그대로 따라하라고 말했다. 이장훈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매일 노인의 어깨와 허리를 마사지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장훈과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노인은 그에게 한의학 지식을 전수해 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전수한 기술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며 허풍을 떨었다. 이장훈은 딱히 그 말을 믿은 건 아니었지만 넘쳐나는 게 시간이었기에 그를 따라 의술과 무예를 익히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용자 중 한 명이 갑자기 쓰러졌고 교도의마저 속수무책이던 상황에 그가 대충 배운 지식으로 그 수용자를 살려냈을 때 그제야 비로소 노인의 말이 허풍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수용자는 물론이고 교도관들까지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면 그를 찾아오게 되었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서 감방 밖의 재벌들도 돈을 들고 한번 봐주십사 하고 찾아오는 정도까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어느덧 흘러 이장훈의 출소 날짜가 다가왔다. 그리운 아내와 아이,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하니 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말 보고 싶었어. 이 날이 드디어 왔구나.” 이때 붉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그의 앞에서 멈춰섰다. 차 문이 열리고 빨간 오프숄더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그녀에게서는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이 흘러넘쳤다. 이장훈은 여자를 보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3년만에 만난 그의 아내는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그는 양팔을 벌리며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3년 동안 당신 생각만 했는데 드디어 만났네. 정말 보고 싶었어!” 김인영은 대놓고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다… 다가오지 마. 당신 냄새 나. 나한테까지 그 재수 없는 기운 묻히지 말라고.” 활짝 웃고 있던 이장훈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내를 대신해서 3년이나 감방에서 고생하고 나왔는데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행색이 초라하다고 하는 말일 거야.’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집에 가서 일단 씻어야겠어. 당신 말 대로 감방 기운을 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김인영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이장훈, 당신이랑 감동의 재회나 하려고 여기 온 건 아니야. 내가 몇 번이나 면회하러 찾아갔지만 당신은 항상 거부했었지. 오늘은 더 이상 피하지 말고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난 당신이랑 이혼하러 여기 온 거야.” 이혼? 이장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김인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혼을… 한다고? 나랑?” 김인영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맞아. 이혼!” 이장훈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기다리고 있던 결말이 이혼일 줄이야! 마치 가슴에 비수가 꽂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나랑 이혼할 거야?” 김인영은 단호하게 이장훈을 바라보며 답했다. “3년 동안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리 벌어졌어. 시간이 우리를 멀어지게 한 거야. 3년 동안 난 회사의 수익을 열 배로 끌어올렸어. 장영 물산은 이제 자산 가치가 100억을 육박하는 큰 회사가 되었어. 난 송강시에서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 되었고 당신은 사람들이 혐오하는 전과자가 되었지.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을 거야. 그리고 당신은 이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격을 잃었어.” 자격을 잃었다는 말에 이장훈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3년 동안 출소하는 날만 바라보며 살아왔고 고된 수용 생활 중에도 사회로 돌아갔을 때 뒤처지지 않으려고 스승님을 따라 의술과 무예를 연마했다. 그의 성장은 스승마저 놀랄 정도였다. 그 배후에는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최근 병 좀 고쳐달라고 그를 찾아온 재벌만 수십 명이 넘었다. 그들 대부분은 모아 놓은 재산을 전부 바쳐도 좋으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그에게 부탁했고 그리하여 그는 감방 생활을 하면서 쌓아놓은 돈이 무려 조 단위가 되었다. 그는 이 돈으로 아내와 딸에게 풍족한 삶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라는 사람이 돈 좀 벌었다고 다짜고짜 이혼부터 제기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장훈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고 당장 이혼서에 사인하고 싶었지만 사랑스러운 딸의 얼굴이 떠오르자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그는 소중한 딸을 위해서라도 김인영을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사실 돈은 나도 많이 벌었어. 대충 계산해도 2조는 넘을 거야.” 김인영은 하찮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거렸다. “당신 지금 꿈 꾸고 있는 거야?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2조가 무슨 애들 용돈이야? 호주머니에 만원 한 장 없는 주제에!” 이장훈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날 안 믿어도 좋아. 내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예령이는? 예령이 생각은 안 해?” 그 말에 김인영이 코웃음쳤다. “예령이 말은 꺼내지도 마. 지금 나랑 같이 살지도 않고 1년에 몇 번 얼굴 보는 게 다야. 내가 엄마인데 그 배은망덕한 녀석은 할머니랑 할아버지밖에 모른다니까. 어휴, 정 떨어져. 양육권은 필요 없고 회사만 내 명의로 해줘.” 딸을 포기하겠다는 아내의 말은 이장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완전히 실망한 그는 분노에 치를 떨며 포효하듯 소리쳤다. “이혼? 그래! 원하는 대로 해줄게! 장영 물산은 내가 설립한 내 회사야. 부부 공동재산의 범주에 속하니까 당신은 지분의 반만 가져갈 수 있어.” 김인영이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장훈 씨, 당신이 수감되기 전에 이미 회사 명의는 내 이름으로 변경했어. 회사 지분을 나눠 갖고 싶으면 예령이 양육권은 포기해. 아, 참. 당신 부모님은 예령이 없으면 못 산다고 하더라!” 이장훈은 그제야 이 모든 것이 김인영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비록 장영 물산을 그가 설립했고 지금 잘나가고 있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에 비하면 회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양육권만 필요해.” 그가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 몰랐던 건지, 김인영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혼 합의서야. 사인만 해.” 이장훈은 서류를 받아 사인을 휘갈긴 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김인영, 언젠가는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김인영은 이혼서류를 받고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힐끗 보며 비아냥거렸다. “후회? 후회는 당신이 하겠지! 전과 이력 때문에 취직이 어려워도 절대 나 찾아오지 마. 참, 내가 그 말은 안 했구나. 내가 오늘 큰 사업 미팅이 잡혀 있어서 오늘은 서류 제출이 힘들 것 같아. 내일 아침 여덟 시에 구청 앞에서 만나.” 오늘은 그녀가 태진 그룹 대표이사인 조수연을 만나는 날이었다. 태진 그룹 창시자인 조태풍 회장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그의 손녀인 조수연이 회사를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상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주목받고 있는 조수연을 만나기 위해 김인영은 아는 지인을 모두 동원해서 선물을 보냈고 드디어 어렵사이 오늘 열 시에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이혼 접수한다고 이런 중요한 자리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장훈은 더 이상 그녀의 얘기가 듣고 싶지 않아 짜증스럽게 손을 저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내일 아침 여덟 시 정각에 구청에서 만나. 이혼이 접수되면 나도 다시는 당신의 그 얼굴 보고 싶지 않아.” 김인영은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더 이상 얘기도 하기 싫다는 듯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는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이장훈은 교도소 대문 앞에 서서 한참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감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김인영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하소연했다. 아이의 옆에는 엄마가 꼭 필요하다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기에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건 새빨간 거짓이었다. 그가 넋을 잃고 있는 사이,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그의 앞에서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조태풍은 대문 앞에 홀로 서 있는 이장훈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다가갔다. “드디어 찾았네요, 이 선생!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이 선생밖에 없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나 좀 살려주세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장훈이 말했다. “금방 이혼한 신세라서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네요.” 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섰다. 그는 빨리 집으로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수감 생활 3년 동안 부모님이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은 것도 뭔가 이상했기에 그는 마음이 급했다. 조태풍은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가져온 카드를 그에게 건넸다. “마음이 불편하실 텐데 이렇게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 안에 2천억이 들어 있어요. 부족하시면 더 드릴 수도 있으니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말을 마친 조태풍은 그대로 땅에 무릎을 꿇었다. 이장훈은 무감각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그에게 말했다. “일어나세요. 어르신께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저도 지금 기분으로는 치료를 해드릴 수 없는 상황이고요. 저는 배림구의 산경 마을에 살고 이장훈이라고 합니다.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오세요.” 말을 마친 그는 미련없이 뒤돌아섰다. 조태풍은 손에 쥔 블랙카드와 멀어지는 이장훈의 뒷모습을 번갈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송강에서 태진 그룹 조 회장님 한번 만나 뵙고 싶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지경인데 정작 그가 거금까지 들고 찾아왔지만 청년은 그에게 제대로 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물론 조태풍은 이장훈을 탓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가 재수가 없어 하필 이장훈이 기분이 가장 최악일 때 찾아온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는 대체 어떤 눈 먼 여자가 저런 뛰어난 사내를 버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가 미쳤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 선생 같은 남자를….’ 그런 생각을 하던 조태풍의 두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손녀 조수연도 아직 솔로라는 것이 떠올랐다. 만약 손녀와 이 신의 손을 가진 청년을 이어준다면 병 치료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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