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그래." 안소희는 대답 후 곧바로 통화를 종료했고, 메시지로 시간과 장소를 보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노크 소리와 함께
나영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어, 볼 일 있어."
안소희는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고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예전의 다정했던 모습과 달리 그녀는 쌀쌀맞고 서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할아버지께서 찾으셔, 네가 계속 통화 중이라고 하더라." 나영재가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서도훈과 통화하느라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못한 안소희는 멈칫하더니 핸드폰을 건네받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하구나,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방금 영재랑 급하게 가서 깜빡했는데, 지난번에 남은 그 바둑판은 아무리 해도 풀 수가 없더라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영재는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듣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안소희가 친해진 후부터, 할아버지는 나영재보다 안소희를 더 많이 찾았다.
그러고는 항상 "소희라면 너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겠지.", "소희보다 한참 멀었구나", "너 같은 멍청한 손자를 뒀다니."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안소희는 할아버지의 "손녀"가 되었고,
나영재는 찬밥 신세가 돼버렸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나영재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안소희에게 쏠렸다.
나영재도 2년 동안은 그 다정함을 만끽했었다.
바로 그때,
침대에 놓인 안소희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영재는 무의식적으로 침대 위의 핸드폰을 보았으나,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안소희가 재빨리 손에 넣고 화면을 꺼버렸다.
1초도 안 되는 사이였던지라 미처 반응도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랑 얘기 끝났어." 안소희는 차분한 얼굴로 나영재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받아."
그러나 나영재는 받지 않았고,
그의 시선은 여전히 안소희가 등 뒤로 감춘 핸드폰에 쏠려 있었다.
내용을 정확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서도훈이라는 이름이 스친 것 같았다.
"안 받아?" 안소희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건넸다.
그러나 나영재는 핸드폰을 받지 않고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누군데."
"내 프라이버시야." 안소희는 매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나영재는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었다. "난 네 남편이야."
안소희는 말없이 나영재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나영재는 평소보다 맑고 깨끗한 소년미를 풍겼으며, 살짝 올린 소매 아래로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나영재가 한 짓을 논하지 않고 얼굴만 본다면 정말 연예인 못지않았다.
나영재는 안소희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아직 이혼 도장 안 찍었으니까, 네가 누구랑 연락하는지 알 권리는 있어."
"나영재,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안소희는 나영재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남편이라고 해도, 내 동의 없이는 그럴 권리 없어."
"안소희!" 나영재가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자, 분위기도 한층 더 싸해졌다.
나영재는 서도훈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같은 업계는 아니지만, 서도훈은 냉혹하고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무정함으로 유명했다.
안소희가 서도훈과 엮인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핸드폰 이리 줘."
"싫어."
"꼭 내가 뺏어야겠어?" 나영재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줄 수는 있는데," 안소희는 말씨름하기 싫어서 아무런 핑계나 댔다. "네 핸드폰도 보여줘."
나영재는 생각도 하지 않고 서도훈과 연락하는 게 맞는지 알고 싶어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너랑 허가윤의 채팅 기록도 볼 거야." 안소희는 나영재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꺼내 들었다.
나영재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잠시 생각한 후 역시나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럼 나도 못줘." 안소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나영재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검은 눈동자로 안소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결국 나영재는 이 한마디만 남긴 채 핸드폰을 받고 나갔다. "마음대로 해."
두 사람은 그렇게 또 말다툼만 하다가 헤어졌다.
안소희는 나영재가 화를 내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닫은 후 씻고 잠에 들었다.
다음날, 둘은 여전히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나영재는 점심쯤 통화를 하더니 곧바로 나갔고, 안소희도 서도훈을 만나러 밖을 나섰다.
두 사람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약속을 잡았다.
안소희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이미 도착한 서도훈을 만나게 되었다.
서도훈과 나영재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나영재는 냉담하고 다가가기 힘든 포스를 풍겼지만, 서도훈은 누구에게나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배려 깊은 모습이었다.
항상 이런 미소를 짓고 있으니 속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나도 이런 모습, 기뻐도 이런 모습, 싫어도 이런 모습이니 백은우와 다른 친구들은 서도훈에게 여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런 사람이 안소희만은 유난히도 아끼고 잘해준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안소희는 문을 열고 룸에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12시 반이라고 했잖아."
"먼저 와서 기다리는 게 매너지." 서도훈은 피식 웃었다. 우아한 조각 같은 얼굴에 금색 테두리의 안경을 쓰고 회색 캐주얼 슈트를 입은 서도훈은 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옆집 오빠 같았다.
그와 동시에,
룸 밖의 복도.
나영재는 냉미남 둘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한 명은 의문스럽고 여유만만해 보였으며, 한 명은 바람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영재야, 방금 저 룸에 들어간 여자 곧 이혼하는 네 와이프 아니야?" 남자는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 저 룸 예약한 사람,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재벌가 서씨 가문의 후계자이자 법조계의 걸출한 인재 서도훈일 텐데."
나영재는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멈추고 심각한 눈빛으로 물었다. "누구라고?"
"서도훈." 남자는 다시 한번 반복했다.
나영재는 룸의 닫힌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서도훈과 안소희가 껴안고 꽁냥질하는 모습으로 가득했다.
안소희가 정말 서도훈과 엮이다니!
"안 막아?" 온화한 분위기의 남자가 물었다.
"좋은 구경거리인데 왜 막아?" 남자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나영재는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룸의 문을 벌컥 열었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서도훈과 안소희가 바짝 붙어 앉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안소희와 서도훈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나영재를 바라보았다. 나영재를 본 안소희는 멈칫하더니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영재?"
서도훈도 나영재를 바라보았다.
나영재는 서도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평소와 같은 냉담한 얼굴로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죄송합니다, 방을 잘 못 찾았네요."
안소희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졸렬한 핑계를 댄다고?
"설명 안 해?" 서도훈은 옆에 앉은 안소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명할 거 없어." 안소희는 나영재에게 완전히 실망했기에 쿨하게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또 나영재를 만나면 내 정체는 밝히지 마. 나영재는 내가 평범한 직장인인 줄 알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