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백상엽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방금 그냥 농담한 거예요. 지수현 씨, 나 같은 놈은 그냥 무시하고 제발 한 번만 봐줘요.... "
백상엽이 이렇게 말하면서 제 손으로 자기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지수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백상엽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나서야 지수현이 침착하게 발을 거두고는 몸을 돌려 바로 자리를 떴다.
겁먹은 듯했던 백상엽의 눈빛이 순식간에 음침하게 변하더니 지수현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 오늘 이 수모를 똑똑히 기억했어. 지수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지수현이 떠난 것을 본 허정운도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겉으로는 덤덤한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지수현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
‘어쩌면 강수영을 시켜 지수현에 대해 알아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가 예전에 지수현에 대해 알고 있던 내용은 십육 년 전에 지씨 가문에서 잃어버린 딸로, 지연정과 쌍둥이 자매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결혼한 이 삼 년 동안, 그녀는 보통 여자랑 별다를 것 없이 최선을 다해 나를 돌봤지. 그런데 오늘은 정말 좋은 구경을 시켜주네!’
옆에 있던 양주헌도 매우 충격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허정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운아, 방금 수현 씨가 백상엽을 때렸잖아? 그런데 백상엽이 원한은 반드시 갚는 성격이라 분명 수현 씨에게 복수하려 할 거야. 너 그냥 두고 볼래?”
허정운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내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뭐 하러 쓸데없는 일에 참견해?"
"그녀는 어쨌든 네 아내잖아?"
그 마에 허정운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변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얼마 뒤에는 아닐지도 몰라.”
양주헌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너 설마 수현 씨랑 이혼하고 다시 연정 씨랑 사귈 생각이야?”
허정운이 아무 말 하지 않자 양주헌은 그가 묵인한 걸로 알고 바로 입을 열었다.
"네가 원래 좋아하던 사람이 연정 씨니, 어쩌면 이혼하는 것이 너랑 수현 씨 모두에게 더 좋을지도 몰라."
"이혼하자는 말은 지수현이 꺼냈어."
양주헌은 이번에 정말로 놀랐다. 두 사람이 결혼한 이 삼 년 동안, 지수현이 허정운을 얼마나 좋아하지는 그들 모두가 똑똑히 지켜보았다.
‘수현 씨가 정운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설마 자발적으로 이혼하자고 했을까?’
"진짜야? 정말 수현 씨가 먼저 이혼하자고 했으면 도대체 뭘 망설여? 설마 그녀가 위자료를 너무 많이 요구했어?"
허정운은 양주헌의 말에 더욱 짜증이 나서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넌 할 일 없어? 그 여자 스타 일은 잘 처리했어?"
양주헌은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이 룸에 들어가 보니 전이경과 기운철이 이미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허정운의 표정이 음침한 것을 본 전이경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운아, 너는 표정이 왜 그래?”
허정운이 아무 말 하지 않자, 뒤에 있던 양주헌이 놀리듯 말했다.
"누군가는 이혼하자는 말에 마음이 좋지 않으니, 너도 더는 캐묻지 마."
전이경이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밥 먹을 때는 기분 좋게 먹어야 하니, 기분 나쁜 일은 아예 떠올리지도 마."
그들 일행은 허정운과 지수현의 결혼에 대해 모두 좋게 보지 않았다. 특히 지금 지연정이 귀국한 상태라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더욱 위태로워졌다.
줄곧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 하지 않던 기운철이 저도 모르게 물컵을 쥔 손에 꽉 힘주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밥을 먹은 뒤, 전이경과 양주헌이 로얄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제안했다.
"나는 오늘 밤에 일이 있으니 너희들끼리 가.”
허정운이 자리를 뜬 뒤, 기운철도 일이 있어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전이경이 양주헌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두 사람 다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우리 둘이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 한잔할까?”
양주헌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자 친구랑 약속 있으니 너 혼자 마셔."
전이경은 어이가 없었다.
잠깐 침묵하던 그가 양주헌을 보며 말했다.
"너는 정말 연애를 쉬는 적이 없구나. 이번 여자 친구는 스타가 아니겠지?"
"아니야. 다음에 데려와서 한번 보여 줄게."
"뭐야, 이번에는 진심이야?"
"나는 항상 진심이었어."
전이경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됐어, 그냥 가라. 재미없으니 나도 집에 들어갈래!"
****
허정운이 저택에 돌아오자 이미 저녁 아홉 시가 넘었었다.
그는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지수현이 가방을 멘 채 외출하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이미 스웨터를 갈아입고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상태라 세련되고 예뻐 보였다.
"이렇게 늦었는데 어디 가려고?"
지수현도 허정운이 지금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잠시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 요 며칠 돌아오지 않을 거야."
허정운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수현, 네가 유부녀라는 걸 잊지 마! 시간이 이렇게 늦었으니 설령 볼 일이 있대도 나가지 마!"
지수현이 짜증을 내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너랑 무슨 상관이지? 너도 예전에 쩍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잖아? 내가 저택으로 돌아오기로 약속했다고 네가 내 사생활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야!"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시계를 확인하니 대머리독수리와 약속한 시각이 곧 다가왔다.
"네가 도대체 뭐 하러 가는지 확실히 말하지 않는다면 오늘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줄 알아!"
지수현이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말했다.
"비켜!"
허정운은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칠흑같이 어둡고도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지수현의 솜씨를 보니 비록 대단하기는 했지만, 솜씨로 따지자면 나도 이 여자에게 뒤지지 않아.’
‘만약 지수현이 손을 쓴다면, 그 김에 이 여자에게 언제 무공을 배웠는지 물어볼 수 있겠네.’
지수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정운이 막 말을 하려던 순간, 귓가에 문득 "땡"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의아해하는데 지수현이 갑자기 카운트다운을 하기 시작했다.
“3!”
“2!”
“1!”
지수현이 마지막 숫자를 내뱉던 순간, 허정운도 의식을 잃었다.
지수현은 허정운을 소파에 끌어다 눕히고는 몸을 돌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가 다시 깨어나 보니 벌써 이튿날 아침이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허정운이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 예리한 두 눈을 번쩍 떴다.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본 그는 지순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즉시 강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지수현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
이 시각, 열대 우림 속.
한 무리의 사람들이 더 깊은 우림 속으로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걸음이 매우 빨랐다.
그들은 대략 열 명이 넘었는데 모두 밀리터 룩 차림에 사람마다 어느 정도 상처를 입은 상태였지만, 낙오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는 그들이 잘 훈련된 팀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리더가 모든 사람을 이끌고 한 강가로 다가오더니 뒤쪽의 사람들을 보며 영어로 말했다.
"이 강을 건너고 나면 안전할 거야."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아직 한숨을 돌리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먼 곳에서 총소리가 들려오더니 총알 하나가 리더의 미간을 맞혔다.
"텅!"
남자가 쓰러진 뒤로도 주변에서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으며 열 명이 넘는 자들이 순식간에 네다섯 명으로 줄어들었다.
"빨리 강물에 뛰어들어!"
"풍덩"하는 물소리가 나면서 강물이 온통 혼탁해졌다.
지수현은 마치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강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바로 이때, 이어폰에서 대머리독수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리스, 이번의 주요 임무는 전갈을 죽이는 거야. 나머지 몇몇은 피라미에 불과하니 뭔가를 할 주제가 못 돼. 이제 철수할 준비해."
지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줄곧 싹을 자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번 임무의 지휘자는 대머리독수리였다. 그러니 그가 철수하자고 하니 그녀도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총을 거두고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던 순간, 이어폰에서 갑자기 대머리독수리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
지수현도 위험을 감지하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총알 하나가 그녀의 뺨을 스치고 날아가며 순식간에 그녀의 뺨에 상처를 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총을 한 발을 쏘았다. 그 솜씨가 매우 빨라 상대방이 두 번째 총알을 발사하기도 전에 총에 맞아 눈을 크게 뜬 채 바닥에 쓰러져 완전히 숨을 거뒀다.
이어폰에서 휘파람 소리와 함께 대머리독수리의 거침없는 칭찬이 들려왔다.
“정말 대단해, 아이리스. 속도가 여전히 매우 빠르네.”
지수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으니 커미션을 내 계좌로 보내면 돼."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두 사람의 연락을 끊었다.
****
허정운이 꼬박 사흘 동안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했지만 지수현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 사흘 동안, 그의 분위기가 점점 더 싸늘해져 회사 안의 모든 사람이 감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대표님, 제가 찾아낸 지수현 씨의 자료입니다...."
허정운이 자료를 건네받아 뒤져보니 그가 예전에 알아낸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가 싸늘한 표정으로 자료를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이것이 네가 사흘 동안 조사해 낸 성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