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화
임구택은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희고 부드러우며, 붉은빛이 돌았다. 마치 구름이 노을빛을 머금은 것 같았고 붉은빛은 그녀를 더욱 앳되게 보이게 해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그는 데이비드를 물러나게 한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떨어져도 좋아요.”
소희는 일단 한 번 돌아보고 나서야 그에게서 떨어졌고 바로 남자 뒤에 숨어서 강아지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자는 가볍게 웃은 뒤 데이비드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자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는 게 마치 봄에 내리는 가랑비의 냄새 같았다.
남자는 데이비드에게 다가가 목을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데이비드는 보통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소희는 남자의 말에 속뜻을 헤아렸다. 무슨 뜻이야?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녀는 그 개를 보고나니 그제야 셰퍼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셰퍼드보다 더 커서 사람을 놀래키기엔 충분해 보였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그의 담담한 태도를 흉내 내며 말했다. “익숙한 말이네요, 애꿎은 행인이 개한테 물렸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많이 접했어요.”
임구택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나이가 어릴 땐 이가 아주 날카롭죠!”
소희가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임유림이 웃음을 띠며 내려왔다. “소희야 너 왔구나!”
그녀는 연한 화장을 한 채 내려와 소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평소엔 집에 거의 사람이 없어. 여긴 우리 삼촌 어제 봤지?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
소희는 임구택을 바라보며 파리를 먹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오므렸다.
임구택은 아까의 일을 복수하듯 담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어른을 만났는데 인사도 안하나요? 인사예의도 모르면서 가정교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임유림은 임구택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른 채 임구택에게 눈치를 줬고 임구택은 못 본 척했다.
소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이빨 사이로 두 글자를 짜내는 듯했다. “삼...촌!”
임구택은 폼을 잡으며 데이비드를 데리고 소파에 앉았다. “네, 좋아요.”
이렇게 날뛰는 임구택을 보고 있자니 소희는 그제야 그가 예전에 강성의 악질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유민이는 위층에 있어, 나랑 같이 올라가자.” 임유림은 소희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소희는 나무 마루를 밟고 올라가면서 아래를 보았다. 셰퍼드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모습이 아주 조화로워 보였다.
소희는 갑자기 설희를 떠올렸다. 설희는 사실 줄곧 임구택을 잊지 않았다. 그의 예전 서재 밖에 엎드려서 안에 소리를 들으려 하는 모습이 주인이 아직 안에 있는 줄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임구택은 이미 새로운 애완견이 있었고 설희는 잊은지 오래다.
유림은 계단을 돌며 사과했다. “처음부턴 널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아직 삼촌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약점을 숨기려는 단점이 있어. 오늘 삼촌께 너의 가정교사 일을 승낙해달라고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가 그를 찾을 일이 있으면, 삼촌은 반드시 널 도와줄 거야.”
소희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다시 미소를 찾았다. “고마워, 유림아.”
“아니야, 우리가 친하진 않았어도 난 항상 널 존경하고 너와 친구하고 싶었어.”
소희는 싱긋 웃었다. “우리 이미 친구야!”
임유림은 상큼하게 웃으며 소희의 손을 잡았고 소희는 순간적으로 긴장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유민의 방문 앞까지 온 뒤 유림은 방문을 두드렸다. “유민아, 나 들어간다!”
안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유림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거실에는 오른쪽엔 화장실, 왼쪽엔 침실이 있었고 인테리어는 모두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열 살쯤 된 남자아이가 소파에 틀어박혀 태블릿을 안은 채 게임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임유민, 새로 오신 가정교사 선생님이야. 내 학교 친구니까 괴롭히지마!” 임유림은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몰랐어!”
임유민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지만 “응”한마디 하고 다시 게임에 열중했다.
임유림은 심호흡을 하고 화를 억누른 채 소희에게 말했다. “내 동생이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포기하지 마!”
“걱정하지 마!”소희는 유림에게 안심의 눈빛을 보냈다.
승낙한 이상 열심히 잘해야지, 임구택은 싫지만 유림이는 나한테 잘해주잖아.
유림은 임구택의 전화번호를 소희의 핸드폰에 저장해놨다. “난 약속이 있어 먼저 가볼게. 유민이가 괴롭히려 하면 삼촌 불러!”
소희는 그녀가 유민에게 맞는다고 한들 임구택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림이 떠나고 나서 소희는 방을 한 바퀴 돌고 책상으로 갔다. 숙제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채 제자리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소파 앞으로 가 유민이 옆에 앉았다. “숙제도 안 하고 놀기만 하네. 부모님이 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그의 부모님이 떠나자마자 가정교사는 그만두었다. 유민이 일부러 가정교사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유민은 게임을 하던 손을 멈추고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나이를 뛰어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 아니면 너도 금방 그만두게 만들 거야.”
소희는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반항으로 부모님 관심을 끌려 하는 건 유치한 행동이야.”
유민은 손에 있는 태블릿을 꽉 쥐고 굳은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희는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숙제 먼저 하고 나랑 같이 게임하는 건 어때?”
유민은 비웃었다. “아까는 나를 그렇게 비웃더니 이제와서 아이 다루는 것 마냥 달래려고 하는 거야? 너희 어른들은 항상 이런 식이야?”
소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어른이야? 나도 아직 아이야!”
임유민은 그녀의 진지한 얼굴을 보다가 잠시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
소희는 마지못해 미소를 지으며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됐어, 나도 게임할 거야, 너랑 게임이나 좀 하다가 가야겠다.”
임유민은 그녀를 의심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소희는 이미 게임을 켠 채 담담하게 말했다. “진짜야. 나도 원래 너 가르칠 생각 없었어. 너희 누나가 날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여기 오게 했을 뿐이야.”
임유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불쌍해?”
소희는 목소리를 낮췄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없이 할아버지가 키워주셨어. 나무 장사하시면서 힘들게 돈을 벌어 학교 보내주셨는데 며칠 전부터 할아버지가 아프셔, 돈 벌어서 할아버지 병원에 보내드려야 해.”
소희는 말하면서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임유민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네가 내 가정교사가 되면 네 할아버지 병 고칠 돈이 생기는 거야?”
소희는 속으로 도박이 성공했다며 기뻐했다. 유민은 부모님과 지내는 시간이 적어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정이 더 깊었다. 다른 사람의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니 약간의 정이 들었다.
소희는 슬픔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맞아, 널 가르치는 게 돈을 훨씬 많이 벌어, 이게 할아버지 병원 보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야.”
임유민은 마지못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그래, 내가 너 여기 있게 해줄게, 하지만 네가 아니라 네 할아버지 때문이야.”
소희는 웃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녀의 할아버지까지 신경을 썼다.
그녀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도 나한테 협조해야 해. 숙제 빨리해줬으면 좋겠어. 만약 내가 여기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걸 너희 삼촌이 알게 되면 날 내쫓으려 할 거야.”
“정말 귀찮게 하네!”유민은 태블릿을 버리고 책상으로 갔다. “그럼 빨리하자! 그리고 아까 숙제 끝나면 나랑 게임하기로 했던 거 잊지 마!”
“Yes, sir!” 소희는 웃으며 일어났다.
......
한 시간 동안 아래층에 머물던 임구택은 위층으로 올라가 유민의 방을 지나쳤다. 그는 문득 소희에게 유민을 훈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임구택이 다가가기도 전에 안에서 소희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죽겠다!”
“어디야, 내가 금방 구하러 갈게!”
유민이 화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야 이 초보야! 누굴 때리는 거야! 그건 나야!”
“어?”
임구택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게임에 빠져있던 소희가 고개를 든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고 계시는 거죠?” 남자가 침울한 표정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