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어찌 된 일이냐? 오전에 이 소의를 관대히 처분한 것이 서운하여 짐에게 성을 내는 것이냐? 네 일을 내가 돌봐주지 않았다 생각해서 그러느냐?”
평소라면 강희진이 먼저 달려들었을 텐데 오늘은 아니었다.
선우진은 그녀가 성내고 있는 줄 알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닙니다, 폐하. 소첩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사옵니다.”
강희진이 고민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엉뚱한 오해였다.
숙빈과의 다툼에서 그녀는 선우진이 자신을 감싸줄 거라 기대한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진심을 폐하에게 드러낼 순 없는 일.
생각이 미치자 답답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렇다면 어째서 짐에게 기대지 않는 것이냐?”
선우진이 여자를 훑어보며 더욱 혼란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강희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문이 막혔다.
“짐은 네 마음을 읽는 데 흥미가 없다. 원치 않는다면 강요하지 않겠노라.”
막바지에 접어든 상소장 처리로 지친 몸에 강희진의 냉대까지 더해져 선우진의 성미는 더욱 상했다.
투덜거리며 내뱉은 말과 함께 소매를 휘저으며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
“폐하...”
강희진이 허망하게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 텅 빈 방에 가느다란 한숨이 스쳤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창밖에는 빗방울이 처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 추운 날인데 어머니께서는 따뜻하게 지내시고 계실까.'
강씨 집안의 성품이라면 약속 따위는 지킬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걱정이 커질수록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을 바랐다.
추렵 때 강상목을 만나 어머니를 넘겨받아 모시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돌덩이가 내려앉을 터였다.
생각에 깊이 빠진 그녀는 병풍 뒤에서 볼을 붉힌 채 노려보는 동월의 시선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동월이의 눈에는 증오의 빛만 가득 차 있었다.
...
사흘 후, 추렵이 시작되었다.
선우진은 명광궁을 떠난 후로 강희진을 찾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씩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대로 영원히 냉대당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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