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다음날 아침, 진가희가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고희숙은 어젯밤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하도훈과 단둘이 어디를 갔는지도 물어보지 않고 보양식 한 그릇을 진가희에게 주었다.
진가희는 혹시라도 고희숙이 질문을 해올까 봐 걱정했다.
다른 사람에게 사생활을 염탐당하는 듯한 불쾌함은 여전히 진가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옷이 벗겨진 채 알몸으로 사람들 앞에 던져진 느낌이 들었다.
보양식을 들이킨 진가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전 학교에 수업 들으러 가볼게요."
얼마 전 결석계를 냈는데 오늘까지라 다시 학교로 복귀해야 했다.
"그래. 가 봐."
진가희는 별다른 말없이 진씨 집안을 나서 택시를 잡아타고 학교로 향했다. 택시에 탄 진가희는 한 손에 핸드폰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여 액정을 바라보았다.
위에 하도훈이라는 이름과 함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 번호는 어젯밤 하도훈이 편하게 연락하라며 진가희의 핸드폰에 저장해 준 것이다.
진가희의 손가락이 핸드폰 액정을 꾹 눌렀다.
오늘 학교에는 진가희가 교양과목으로 고른 체육 수업이 있었다. 진가희와 다른 학생들은 교수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따라 운동장을 한 바퀴 또 한 바퀴를 돌았다.
진가희는 평소에 체력이 좋았는데 오늘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얼마 뛰지도 않아서 숨을 헐떡거렸다.
아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달리기를 마치고 교수님이 자유시간을 주었다.
허지연이 뒤따라와 진가희의 옆에 섰다. "너 진짜 우지성이랑 헤어졌어?"
진가희는 우지성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허지연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가희야."
팔이 붙잡힌 진가희는 강제로 멈춰서 작게 대답했다. "응."
"헤어지는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우지성의 가정환경이 안 좋아서 그래?"
진가희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우지성에게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 오히려 진가희는 우지성에게 그를 사랑하는 부모님과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그래서 예전에는 우지성과 결혼하면 자신도 이런 가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크지 않을지라도 두 사람이 살기에 충분한 환경이면 진가희는 행복했다.
진가희는 허지연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허지연은 오늘 진가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점심에 나랑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우리 부모님한테 고급스러운 식사 자리가 있는데 너도 구경시켜 줄게."
허지연의 집안은 은행 업계에 종사하고 있어 가정 형편이 아주 좋았다. 명실상부한 재벌 2세인 허지연은 평범한 학생들이 접할 수 없는 식사 자리에 자주 참석했다.
그러나 진가희는 그런 것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허지연은 진가희의 몸을 흔들며 졸랐다. "나랑 같이 가자 가희야. 나랑 밥 먹어 준다고 생각해."
진가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
그리하여 진가희는 점심시간에 허지연과 함께 밥 먹으러 갔다.
화려한 호텔에 도착한 진가희는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허지연은 진가희가 후회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진가희가 막을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진가희는 허지연이 비밀스럽게 웃는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진가희는 망설여졌다. 이런 식사 자리에 참석한 적이 없어 겁이 났다. "지연아, 나 그냥 갈게. 안 될 것 같아."
그러나 허지연은 진가희를 억지로 끌고 갔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어. 이런 고급스러운 식사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자리야. 조금 있다가 깜짝 놀라게 해줄게."
곧이어 단향목으로 된 문이 허지연에 의해 열리고 진가희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권력을 상징하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 위쪽에는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은 와인 잔들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신분과 배경을 알 수 없는 화려하고 눈부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진가희는 조명 아래에서 오랜만에 우지성의 얼굴을 보았다. 우지성은 술잔을 들고 공손한 자세로 하도훈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검은 양복에 짙은 남색 넥타이를 한 하도훈은 손에 와인 잔을 든 채 시선을 내려 자신에게 술을 권하고 있는 우지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지성도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풋풋한 느낌이 짙어 하도훈의 앞에 서 있으니 병사처럼 작아 보였다.
화려한 방 안에서 우지성만 동떨어져 보였다.
이곳은 권력과 부귀가 있는 자리이다.
진가희는 이 장면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허지연이 진가희의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내가 부모님한테 우지성에게 대단한 거물들을 소개해 달라고 했거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우리 부모님도 머리 숙이고 허리 굽혀 조심스럽게 대하는 분들이야. 안심해, 우지성은 분명 출세할 거야."
"학교에서 우지성이 얼마나 자긍심 높은 사람이야. 자존심을 굽히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
진가희는 허지연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시선으로 눈앞의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 몇 초 사이에 기척을 느낀 하도훈이 고개를 기울여 멀리 문 앞에 서 있는 진가희를 훑어봤다.
하도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희?"
"가희야!"
서로 다른 두 가지 음성이 동시에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