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어떤 여자랑 같이 있길래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아?
검은색 차 안, 값비싼 슈트를 입고 금색 테 안경을 쓴 남자가 두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뒷좌석 시트에 몸을 기댔다.
옆에 앉은 여자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가 슬며시 떠진 남자의 눈과 눈이 마주치고서야 다시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이우진은 그녀의 행동을 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호한테 외숙모라고 한번 불렸다고 들뜨기라도 한 거야?”
신혜정은 그 말에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손을 꽉 말아쥔 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니요.”
그녀는 이우진의 곁에 10년 가까이 있었기에 이우진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이우진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양볼을 잡고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그래. 사람은 본디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안 그래?”
옅은 화장을 한 신혜정의 볼이 핑크색이었다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신혜정은 이우진이 지금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이우진을 사랑하고 있고 그와 함께 잠자리도 가졌다. 하지만 그와 결혼까지 꿈을 꾸지는 못했다.
이우진이 허락해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신혜정은 근 10년간 그의 옆에서 그 누구도 모르는 ‘애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이우진은 신혜정의 말이 끝난 후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격렬한 키스에 신혜정은 조금 풀어진 얼굴로 열렬히 응했다. 하지만 더 이어가려는 찰나 이우진이 갑자기 몸을 떼어내고 그녀를 밀쳐버렸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신혜정도 그에 의해 엉망이 된 치마를 정리하고 얼른 다시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우진 앞에서 그녀는 아무런 발언권도 없었고 아무런 존엄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다.
이우진은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후 다시 신혜정 쪽을 바라보았다.
“며칠 뒤면 수호 할아버지 생신이야. 보나 마나 수호는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네가 알아서 준비해. 그리고 수호 잘 지켜봐.”
“네, 알겠습니다.”
신혜정은 입술이 하얗게 질려있었고 목소리도 조금 떨려 있었다.
...
김유정은 차를 몰고 또 다른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후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다시 차를 몰고 자성 그룹으로 향했다.
자성 그룹은 경성시의 유명한 패션 디자인 회사이고 김유정은 귀국한 후 바로 스카우트가 되어 현재 자성에서 디자이너 겸 전무직을 맡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26층에서 멈추고 김유정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민트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셔츠 단추는 딱 알맞게 풀어 헤쳐져 있어 마침 흰색 쇄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목에는 제일 최신 아이템인 값비싼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귀에는 그와 세트인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김유정은 원체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이라 옅은 화장에도 여전히 미모가 돋보였고 케어를 잘한 검은색 웨이브 머리카락은 마치 검은 물결처럼 일렁여 그의 새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녀는 하의로 살짝 물이 빠진 듯한 청바지를 입었고 신발은 특별주문한 하이힐을 신었다. 무척이나 캐주얼해 보이면서도 디테일한 부분에 포인트를 준 것이 역시 디자이너다웠다.
김유정은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직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직원들은 그녀를 보더니 하나둘 하던 업무를 멈추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김유정은 직원들에게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고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
곽혜인은 김유정이 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따라 들어와 그녀에게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건넸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상쾌한 향이 나는 디퓨저를 내려놓았다.
곽혜인은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라 김유정의 루틴을 빠르게 파악했다.
“이건 다음 분기 시장조사 보고 자료들입니다.”
김유정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눈앞에 있는 자료들을 쭉 훑어보았다.
“다다음 분기의 시장 흐름 분석표도 부탁드려요.”
곽혜인은 그 말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정을 향한 그녀의 눈빛에는 무한한 동경이 어려 있었다.
곽혜인은 김유정의 업무 능력에 탄복하고 또 탄복했다. 그녀 덕에 회사가 큰 프로젝트도 무사히 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참, 성우 그룹 프로젝트는 현재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김유정이 물었다.
“지혜 씨가 팔로우한 지 일주일 정도 되어갑니다. 아마 큰 이변이 없으면 오늘 내로 계약할 수 있을 겁니다.”
김유정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이만 나가보라고 했다.
곽혜인은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궁금증이 도져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들이 그러던데 유정 씨 결혼했다면서요?”
김유정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네, 맞아요.”
이에 곽혜인은 그녀의 텅 비어있는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한 번도 반지를 끼고 다닌 적이 없잖아요.”
“평소 손을 쓸 일이 많다 보니 걸리적거려서 빼고 다녀요.”
이런 거짓말은 곽혜인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만 통할 수 있는 말이다.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와 결혼했는지 다 알고 있고 그 결혼에 결혼식도 없었고 결혼반지도 없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그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녀와 연수호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곽혜인이 나간 후 김유정은 다시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최근의 자성 그룹은 말하자면 업무량 폭탄이었고 그로 인해 그녀 역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다행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보니 연수호의 일도 빠르게 잊혀갔다.
김유정은 바쁘게 일만 하다가 도우미인 장미영으로부터 식사는 집에서 할 건지 물어보는 전화를 받고서야 퇴근 시간이 됐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전화를 안 받으세요. 집으로 돌아와서 식사하실 건지 사모님이 대신 물어봐 주실 수 있나요?”
장미영의 말에 김유정은 손에 든 펜을 내려놓았다.
고작 밥 한번 먹는데도 연수호는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었다.
“네, 제가 물어볼게요.”
김유정은 전화를 끊은 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그가 아침에 한 말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수호는 전화가 끊기기 직전에서야 전화를 받았다.
“왜?”
쌀쌀한 말투에 김유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또 어떤 여자랑 같이 있길래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아?”
전화기 너머로 연수호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지금 질투해?”
“질투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이 쓸모가 없어 보이려나?”
김유정의 반문에 연수호는 빈정거리며 대꾸했다.
“어젯밤에는 이런 태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김유정은 연수호와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었다. 그래서 빨리 저녁은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려는데 전화기 너머로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유정 씨야? 잘됐네. 유정 씨도 여기로 불러. 아니면 또 너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오해하겠다.”
이건 누가 봐도 정아진의 목소리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던 남자가 지금은 또 자칭 그의 ‘친구’와 함께 있다.
타인을 속 좁은 사람 취급하는 정아진의 말에 김유정은 심기가 뒤틀려져 연수호가 뭐라고 얘기도 하기 전에 전화기에 대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아내가 바람나는 꼴이 보고 싶은 거라면 그렇다고 대놓고 얘기를 해. 기대에 부응해줄 테니까.”
“김유정!”
연수호가 곧바로 반응해왔다.
직접 보지 않아도 지금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절로 상상이 갔다.
“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야.”
김유정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여진은 그저 연수호와 이혼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 바람이 나서는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김유정은 집안이나 외모나 경성시에서 거의 상위 1%에 드는 여자였다. 결혼하기 전에도 그렇고 결혼한 후에도 그렇고 어떻게든 그녀를 꼬셔보려 하는 남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김유정에게 관심이 없는 인간은 오직 한 명, 연수호밖에 없었다.
일을 마친 김유정이 차에 앉아 시동을 걸려는데 곽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큰일 났어요. 지혜 씨 쪽에 일이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