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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박강우는 애교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강은영이 세 살 정도 됐을 때, 항상 양갈래 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젖살이 오른 통통한 볼까지 더해져 귀엽고 사랑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어린 강은영은 항상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는 지난 날을 회상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여자는 이미 해고했어.” 강은영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꼬리 치는 여자가 어디 이유빈 씨 한 명뿐이겠어?” 박강우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강설아에게까지 주먹질을 하는 그녀의 태도를 봐서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한 며칠은 그와 냉전을 할 기세였다. “양민호 사촌 동생이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좀 과감했나 봐.” 양민호는 강은영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의 사촌동생이 박강우를 좋아해서 쫓아다닌다는 얘기는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회사에 방문한 첫날에 부딪힐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혼 서류 얘기는 다시 안 나왔으면 좋겠어.” 그녀가 말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박강우도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그의 곁에 남기로 했다면 앞으로 누구든 이혼 얘기를 꺼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강은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남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회의하러 가. 난 여기서 기다릴게.” “그래.” 박강우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류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회의실 분위기는 평소에 비해 더 순조로웠다. 박강우와 오래 일한 고위 임원들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속으로 강은영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런 좋은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갑게 식었다. “윤 부장.” “네, 대표님.” “강영물산과의 비즈니스는 윤 부장이 맡아서 했었지?” 윤 부장은 상사의 싸늘한 말투에 저도 모르게 위축되어 박강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는 음침하게 굳은 박강우의 얼굴을 보며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강영물산 강 회장이 박강우의 장인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편의도 많이 줬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 장인어른이 또 어디가 불만인 걸까? 박강우는 불안에 떨고 있는 윤 부장을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진 비서한테 연락 못 받았어? 우리 강영물산과의 모든 비즈니스를 정리하기로 했어. 그런데 그쪽 관련 사업이 왜 아직도 내 책상 위에 있는 거지?” 윤 부장은 멍한 얼굴로 진기웅을 바라봤다. 순간 부담감은 진기웅의 몫이 되었다. 어제 너무 늦게 내려진 지시라 아직 실행에 옮기기 전이었다. “진 비서.” 윤 부장이 말이 없자 박강우는 싸늘한 시선을 진기웅에게 돌렸다. “진 비서 일처리 속도가 고작 이 정도였어?” 말을 마친 그는 강영물산 관련 서류들을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던졌다. 다른 사람들은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원래도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지만 강영물산과의 거래를 모두 중지한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진기웅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지시를 전달하지 못했네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회의 자료를 준비하느라 소홀히 했던 게 화근이었다. 박강우는 조용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제 강은영을 대하던 그들의 태도를 생각하며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차게 식었다. “강영물산과의 모든 거래를 오늘 안에 중지해. 은행 쪽에 연락해서 우리 회사 명의로 담보 서준 것도 전부 빼라고 하고.” “네.” 진기웅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연락을 돌리러 갔다.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박강우는 긴급 사안 몇 개를 처리하고 강영물산이 빠지고 남을 공백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강은영을 봐서 적지 않은 알짜배기 사업들을 강영물산에 던져주었는데 갑자기 중단하니 비상 수단까지 동원해야 했다. 한편, 강은영은 소파에서 잠을 자다가 핸드폰 벨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여보세요.” “너 당장 집으로 들어와!” 수화기 너머로 분노한 강준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은영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준형이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대부분 사업적으로 바라는 게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강준형의 목소리에서 짙은 분노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강준형이었다. 전에는 통화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대하던 딸이었는데 어제부터 강은영의 태도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당장 집으로 들어와! 회사에 큰 문제가 생겼어!” ‘설마 강우 씨가 벌써?’ 어제 강설아의 악행을 고발할 때 보였던 박강우의 표정을 생각하면 뭔가 일을 벌인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너 듣고 있어?” 강은영이 계속 말이 없자 강준형은 점점 더 짜증이 치밀었다. “회사에 문제가 생겼는데 내가 간다고 뭐가 해결돼? 잘난 강설아한테 물어보지 그래? 아빠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생아 말이야. 걔한테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강설아는 복덩이라면서 떠받들면서 일이 생기면 자신을 찾는 그들이 너무 우스웠다. 강준형의 분노한 고함이 들려왔지만 강은영은 더 이상 들을 필요성을 못 느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때 문이 열리고 박강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그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정신을 차린 강은영은 다가가서 그의 목덜미를 껴안으며 물었다. “강영물산을 아예 밟아버리려고?” 조금 전 강준형이 분노한 정도를 생각하면 아마 강영물산은 지금쯤 아수라장이 됐을 것이다. 박강우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왜? 걱정돼?” “그럴 리가. 아주 잘했어.” 박강우는 그제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씨 집안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박강우는 그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옛날에는 그렇게 신경 쓰던 것들에 무관심하지 않은가. 만약 연극이었다면 절대 이 정도까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가자.” 박강우는 팔을 풀고 그녀의 핸드백을 챙기며 말했다. 강은영은 얌전히 남자의 손을 잡고 회사를 나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빛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유빈이 쫓겨났다는 소식은 이미 전 회사에 퍼졌고 여직원들은 더 이상 대놓고 박강우를 쳐다보지 않았다. 사모님 심기를 건드렸다가 이유빈처럼 해고를 당하면 그것만한 손해가 없었다. 강은영은 지금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돌린 박강우는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웃어?” 강은영은 그의 팔에 매달리며 해맑게 말했다. “기분이 좋아서.” 박강우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직원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냉철하고 인정사정 없기로 소문난 보스에게 이토록 자상한 면이 있었다니. 한편, 해연 별장에서는 강설아가 울먹이며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용인들은 여전히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옛날의 공손한 대접은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는 박강우를 보자 다급히 달려왔다. “강우야, 돌아왔구나.” 말투에서 서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어제 이전까지만 해도 자유롭게 출입하고 모두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 서럽기만 했다. 박강우는 인상을 찌푸리고 강설아를 빤히 노려보았다. 강설아는 눈물을 쥐어짜느라 남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은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박강우의 팔목을 잡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강우야, 아무리 오해가 있었다지만 강영물산에 이러면 안 돼.” 강은영은 남편의 손을 자연스레 잡고 있는 강설아를 보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전에는 착한 언니 이미지 때문에 선이라는 걸 어느 정도 지킬 줄 알았는데 강은영이 등을 돌린 뒤로 작심하고 박강우에게 꼬리 치기로 한 모양이었다. 강은영이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서려는데 박강우가 먼저 혐오스럽다는 듯이 그 손을 밀쳐냈다. 강설아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자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박강우가 있었다. 강설아는 그제야 자신과 강은영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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