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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첫 번째도 안 받고 두 번째도 안 받고 그렇게 연거푸 아홉 번을 걸고 나서야 통화가 겨우 연결됐다. 전화기 너머로 고르고 침착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연나은은 문득 고등학교 때 표절로 모함받고 기댈 곳 없이 외롭게 떠돌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그녀는 지금처럼 진시준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다. “괜찮아, 삼촌이 있잖아.” 이렇게 말했던 진시준인데 이젠 오히려 연나은이 먼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건네야만 했다. “그 그림 원고 삼촌이 미나 언니 줬어요?” 진시준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태연하게 인정했다. “응.” 전화기 너머로 긴 숨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왜 그랬어요?” 몇 초 동안 침묵이 흐른 후 진시준이 입을 열었다. “이 그림은 애초에 세간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고 네 이름도 새겨지지 말았어야 했어. 무슨 말인지 몰라?” ‘여전히 누군가에게 들키는 게 두려웠던 거네.’ ‘여전히 내가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할까 봐 걱정한 거였어.’ 연나은은 처량한 미소를 지으며 충혈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지만 표절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미나 언니잖아요. 원고를 그렇게 줘버리면 대체 난 어떻게 표절 의혹을 씻어내란 거예요?! 내 커리어가 다 망하게 생겼다고요!!” “미나는 잠시 어리석게 나왔을 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네가 대신 한 번쯤 뒤집어쓰는 게 뭐가 덧나? 애초에 널 그림 배우게 한 것도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취미를 찾아주기 위해서였어. 뭘 이렇게까지 정색하는 거야. 어차피 내가 널 평생 먹여 살릴 테니 남은 생은 생계 따위 걱정하지 마.” 말을 마친 진시준이 전화를 툭 꺼버렸다. 연나은은 여전히 휴대폰을 귀에 대고 앞에 놓인 거울만 빤히 쳐다봤다. 거울 속에 비친 그녀는 너무 울어서 두 눈이 팅팅 부었고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이게 본인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게 내가 맞아?’ ‘삼촌도 내가 알던 삼촌이 아닌 것 같아.’ ‘온 세상이 내게 등 돌려도 삼촌만은 내 편이었잖아. 그 세상을 등지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내 편이었잖아...’ 연나은은 이젠 더 이상 갈피가 안 잡혔다. 전시회가 수포가 된 후 그녀는 진시준에게 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굳혀졌다. 주변 친구들이 알바를 몇 개 소개해줬는데 골프장 캐디, 럭셔리 호텔 종업원 등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돈만 모을 수 있다면 그녀는 뭐든 다 시도했다. 결국 연나은은 아침 일찍 외출했다가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길 반복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출국을 일주일 앞둔 그녀는 드디어 마지막 남은 몇십억까지 다 모았다. 종업원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마지막 하루도 열심히 일하려고 룸 문을 열었는데 우연인지 인연인지 알바 마지막 날에 진시준을 마주칠 줄이야. 남녀가 한 무리 모여서 게임을 노는 모양인데 진시준이 첫판부터 지고 말았다. 게임 MC가 뭇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벌칙 내용을 읽어줬다. “좋아하는 이성과 3분 동안 키스하기!” 순간 장내가 떠들썩해지고 다들 볼이 빨개진 주미나를 쳐다봤다. 이때 진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뭇사람들을 스쳐지나 연나은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룸 안의 모든 이가 어안이 벙벙해지고 장내가 술렁거렸다. 다들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진시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들고 처음부터 녹화해.” 연나은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고 심장이 파르르 떨렸지만 이전처럼 가슴을 후벼팔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어쩌면 이젠 정말 마음을 내려놓아서인지 더는 상처가 될 일도 없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휴대폰을 건네받고 카메라를 열어 녹화 버튼을 눌렀다. 진시준의 휴대폰은 화질이 엄청 좋았다.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도 연나은은 화면에 담긴 내용이 너무 또렷하게 보였다. 진시준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주미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몸을 기울이고 키스를 퍼부었다. 휴대폰 화면 상단에 시간이 표시되었고 연나은은 정확하게 3분을 쟀다. 다만 영상은 결코 3분 안에 끝나지 않았다. 뜨거운 키스가 끝난 후 진시준이 한쪽 무릎을 꿇더니 옷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한없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미나야, 나랑 결혼해줄래?” 이 남자가 주미나에게 프러포즈하고 있다니... 주미나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연나은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화면 속 두 주인공이 인파들에게 철저히 가려지고 사면팔방에서 축하 봇물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연나은의 귀청을 째지게 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내리고 녹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때 마침 매니저가 다가오며 옆 방에 새로운 손님들이 왔다면서 그녀더러 서빙하러 가라고 했다. 연나은은 옆에 있는 동료에게 휴대폰을 건넨 후 곧장 룸 밖을 나섰다. 1초라도 더는 이 방에 남고 싶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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