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하채원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기분을 알 수 없을 만큼 덤덤했다.
이혼이란 일이 마치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사소한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육태준의 눈동자가 움찔했다.
“뭐라고?”
결혼한 지 3년, 아무리 심한 짓을 해도 하채원은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실 육태준은 하채원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채원의 퀭하던 눈동자는 이 순간만큼은 맑고 깨끗했다.
“태준 씨, 지난 3년 동안 미안했어요. 그만 이혼해요.”
육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옆에 늘어뜨린 손을 움켜쥐었다.
“너 방금 들었지? 하성 그룹은 원래 거의 무너지는데 내가 인수하든 다른 사람이 인수하든 뭐가 달라? 이혼 얘기를 하는 건 뭘 원하는 거야? 아이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돈을 위해서? 아니면 내가 하성 그룹을 상대하지 말라는 거야?”
육태준이 차갑게 되물었다.
“잊지 마.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너의 이런 위협은 나에게 소용없어.”
하채원은 눈빛이 어두워진 채 육태준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져 마른 침을 삼켰지만 귓속이 아파졌다. 보청기를 끼고 있어도 육태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아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육태준이 이상함을 눈치챌까 봐 그녀는 서둘러 서재에서 나왔다.
육태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한 적이 없는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책상을 뒤엎었다.
하채원이 방금 가져온 따뜻한 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
하채원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약 한 움큼을 꺼내 억지로 삼켰다. 손을 뻗어 귀를 만지자 손끝이 온통 새빨갛게 되었다.
약이 작용했는지 날이 막 밝아오자 그녀의 귀는 청력을 회복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작은 햇살을 바라보며 하채원은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비가 그쳤다.
육태준은 오늘 외출하지 않았다.
아침에 그는 소파에 앉아 하채원이 후회하며 사과하기를 기다렸다.
결혼한 지 3년, 하채원은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했는데 육태준은 이번에도 별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하채원이 씻고 나온 후 평소대로 어두운 계열의 옷을 입고 캐리어를 끌며 손에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채원이 합의서를 육태준에게 건네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이혼 합의서라는 몇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태준 씨, 언제 시간이 나면 연락해요.”
하채원은 육태준에게 평범한 이 한마디만 남기고 캐리어를 끌고 나갔다.
밖에 나가니 비 온 뒤의 맑은 하늘이 보였다.
순간 하채원은 자신이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육태준은 이혼 합의서를 들고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늘은 주말이다.
예년 이맘때쯤이면 육태준은 하채원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님 제사를 지냈는데
육씨 가문 친척들에게서 이상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혼자 돌아가는 육태준의 마음은 유달리 즐거웠다.
저택 안.
육태준의 어머니와 제사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의아해했다.
예년 이맘때쯤이면 손자며느리인 하채원은 항상 맨 먼저 오고 맨 마지막에 가며 모두에게 잘 보이려고 했는데 오늘 안 오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고설희는 가늘고 예쁜 눈썹을 찌푸리며 육태준에게 물었다.
“태준아, 채원이는?”
이 말을 들은 육태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혼한다고 집을 나갔어요.”
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용해졌다.
고설희는 더 놀랐다.
이 세상에 부모를 제외하고 하채원보다 육태준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7년 전, 육태준은 하마터면 칼에 찔릴 뻔했는데 하채원이 몸을 던져 구했다.
4년 전, 두 사람이 약혼한 후 육태준이 두바이에 사업 이야기를 하러 갔다가 사고가 났다.
모두가 육태준이 죽었다고 했는데 하채원만 고집을 부리고 그를 찾아갔다.
그 낯선 도시에서 하채원은 꼬박 3일 동안 그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결혼 후,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든 일상생활을 하든 육태준 주변의 모든 사람, 심지어 비서라도 하채원은 미움을 살까 봐 조심스럽게 대했다.
이렇게 육태준과 떨어질 수 없는 하채원이 뜻밖에도 이혼을 제기하다니...
‘왜?’
고설희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아들을 놓아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채원이 같은 여자는 절대 고상한 자리에 오를 수 없으니 이혼하는 것도 좋아. 너랑 안 어울려.”
고설희가 입을 열자 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태준 형은 젊고 능력 있는데 하채원이 발목 잡고 있었어요.”
제사는 한순간 하채원의 비하 대회로 변했는데 마치 그녀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육태준은 즐거워야 맞는데 어쩐지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귀에 거슬려 일찌감치 차를 몰고 저택을 떠났다.
대산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육태준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칠흑 같은 어둠이 온몸을 휩쓸었다. 그는 그제야 하채원이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슬리퍼를 갈아 신고 들어가면서 외투를 세탁기에 버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했던 육태준은 하채원이 떠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술을 가지러 갔다.
그러나 술 저장고에 도착하여 굳게 닫힌 문을 본 그는 뒤늦게 열쇠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외부인이 집에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별장에는 가정부가 없었는데 하채원이 시집온 후 모든 일을 하채원이 도맡아 했다.
육태준은 방으로 돌아가 휴대전화를 켰다. 업무 소식 외에는 지금까지 하루가 지나도록 하채원이 그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 사과하지 않았다.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보자.”
육태준은 핸드폰을 한쪽에 두고 일어나서 성큼성큼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여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
냉장고 안에는 먹을 것 외에도 다양한 한약재가 쌓여 있었는데 그는 한 봉지를 손에 들고 위에 적힌 글을 보았다.
[하루에 다섯 봉지, 불임 전문 약재]
불임...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던 육태준은 전에 하채원에서 나던 약 냄새를 떠올리고 나서야 그 출처를 알게 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데 아무리 약을 많이 먹어도 임신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
한편, 어두컴컴한 여관 안.
하채원은 멍하니 눈을 떴는데 머리가 아프고 주변이 고요했다.
그녀는 병세가 악화하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평소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그녀는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채원은 몸을 더듬어 침대 머리맡에 있는 약을 집어 입에 물었는데 쓰고 떫었다.
어제 3년 동안 살았던 대산 별장을 떠난 후 그녀는 먼저 친정에 갔다.
그런데 막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와 동생 하천우가 육씨 가문이 그녀를 버린 후 그녀를 팔십이 넘은 늙다리에게 시집보내기로 상의하는 것을 들었다.
하채원은 멍해진 채 그제야 자신에겐 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하채원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냥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무서웠다.
단현시의 올해는 비가 예년보다 더 자주 오는 것 같았다.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분주히 움직였는데 그녀만 혼자인 것 같았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시내를 나가는 차표를 한 장 사서 시골로 내려가 줄곧 자신을 돌봐주던 유모 장옥자의 집으로 갔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9시였는데 하채원을 본 장옥자의 자애로운 얼굴이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채원아...”
장옥자의 자애로운 미소를 바라보던 하채원은 코끝이 찡해지며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아줌마...”
장옥자는 건강상의 이유로 줄곧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는데 하채원에게는 친어머니보다 더 친한 분이었다.
이날 밤.
장옥자의 품에 안긴 하채원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장옥자는 그녀를 안은 후에야 매우 말랐고 몸에 살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하채원의 앙상한 등에 손을 얹고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채원아, 태준이가 지금 너한테 잘해주고 있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육태준의 이름을 들은 하채원은 목이 메어와 자기도 모르게 다시 장옥자를 속여 육태준이 잘해준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장옥자가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떠나기로 했으니 더는 자신을 속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태준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돌아왔어요. 전 태준 씨를 자유롭게 놓아주고 이혼할 생각이에요.”
장옥자는 어리둥절한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채원이 육태준과 백년해로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장옥자는 낮은 소리로 그녀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하채원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는데 귓속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장옥자의 목소리를 덮었다.
모처럼 푹 자고 깨어난 하채원은 갑자기 자신이 잤던 곳의 꽃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것이 느껴져 손을 펼쳐 보았더니 온통 피투성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