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4월의 어느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병원 입구.
하채원은 허약한 몸을 이끌고 수척한 손으로 병원에서 받은 임신 검사 보고서를 쥔 채 그 위에 적힌 또렷한 한 줄을 보았다.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임신을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없어? 임신하지 못하면 육씨 가문에서 쫓겨날 거야. 그러면 우리 하씨 가문은 어떻게 해?”
하이힐을 신은 최미영은 환한 옷차림을 한 채 하채원을 가리키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었다.
공허한 눈빛을 지은 하채원은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다.
“죄송해요.”
“엄마는 죄송하다는 말이 필요 없어. 네가 육태준에게 아이를 낳아 주어야 해. 알겠어?”
말문이 막힌 하채원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남편 육태준은 한 번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최미영은 딸의 연약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고는 조금도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다가 차가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 안 되면 육태준을 위해 다른 여자를 찾아 줘. 그러면 너에게 고마워할지도 몰라.”
하채원은 최미영의 떠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친어머니가 뜻밖에도 자신에게 남편을 위해 밖에서 여자를 찾으라고 했다.
한순간 찬바람이 가슴속을 파고드는 듯했다.
...
귀가하는 차 안.
하채원의 머릿속에서는 떠나갈 때 최미영이 뱉었던 마지막 말이 맴돌고 있었는데 갑자기 귓가에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병이 또 악화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에 문자 한 통이 왔다.
육태준이 3년 내내 매일 보내는 같은 말이다.
[오늘 안 들어가.]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육태준은 집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고 하채원을 만진 적도 없다.
하채원은 3년 전인 두 사람의 신혼 첫날밤을 기억한다.
“하씨 가문이 감히 날 속여서 결혼하다니. 평생 외롭게 살다 죽을 각오를 해.”
‘평생 외롭게 살다 죽는다...’
3년 전, 하씨 가문과 육씨 가문은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정략결혼을 하기로 했다. 미리 쌍방의 이익을 약속했지만 결혼식 날, 하씨 가문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육태준이 하채원에게 준 2000억을 포함한 모든 자산을 빼돌렸다.
이것을 떠올린 하채원은 눈빛이 어두워진 채 육태준에게 덤덤하게 한 마디 답장했다.
[알았어요.]
손에 든 임신 검사 보고서가 어느새 종이 뭉치로 구겨져 있었는데 집에 도착한 하채원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매달 이맘때면 그녀는 매우 피곤했다.
저녁을 준비하지 않고 소파에 잠시 기대어 있었더니 자기도 모르게 깜박 졸았다.
그녀의 귓속에서는 항상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도 육태준이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난청을 앓고 있는데 부잣집에서는 장애에 해당한다.
이런 그녀인데 육태준이 어떻게 아이를 낳게 할 수 있겠는가.
벽에 걸린 유럽식 벽시계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새벽 5시를 알렸다.
한 시간 후면 육태준가 돌아올 것이다.
하채원은 그제야 소파에서 하룻밤을 잤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일어나서 육태준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며 늦을까 봐 걱정했다.
육태준은 일을 빈틈없이 하는데 시간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요구가 엄격했다.
6시는 그가 돌아올 시간이다.
반듯한 이태리 정장 차림에 훤칠한 키, 도도한 모습에 잘생긴 얼굴,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는 육태준이지만 하채원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차갑고 소원한 이미지뿐이었다.
그는 하채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그녀의 옆을 스쳐지나 식탁 위의 아침 식사를 보며 비꼬았다.
“매일 이러는 게 가정부랑 뭐가 다르지?”
3년 동안 하채원은 항상 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회색 옷을 입고 심지어 문자 답장도 알겠다는 한마디만 했다.
솔직히 말해서 비즈니스가 걸린 결혼 때문이 아니고, 하씨 가문의 꼼수 때문이 아니라면 그는 이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리가 없다.
‘가정부?’
하채원의 귀에 다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어디서 난 용기인지 입을 열어 한 마디 물었다.
“태준 씨,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육태준의 눈빛은 움찔했다.
“무슨 말이야?”
하채원은 눈앞에 있는 육태준을 올려다보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떫은맛을 억누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랑 함께 해도 된다고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태준이 먼저 말을 잘랐다.
“미쳤어?”
...
육태준이 떠나자 하채원은 베란다에 혼자 앉아 멍하니 처량하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빗소리가 맑게 들렸다 흐릿하게 들렸다를 반복했는데 보청기를 벗자 세상이 조용해졌다.
한 달 전 의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하채원 씨, 청신경과 각급 중추에 병변이 생겨 청력이 다시 나빠졌어요. 계속 악화하면 청력을 잃게 될지도 몰라요.”
이렇게 조용한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거실로 나와 TV를 켜놓고 소리를 최대한 크게 틀었는데 그제야 겨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 TV에서는 글로벌 투어 중인 가수 배다은의 귀국 인터뷰가 방영되고 있었다.
리모컨을 든 하채원의 손이 덜덜 떨렸다.
배다은, 육태준의 첫사랑이다.
몇 년이 지났는데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카메라를 마주하고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였다. 더는 하씨 가문에 지원을 요청할 때의 수줍고 자신감 없던 그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기자가 귀국 이유를 묻자 배다은은 자신만만하고 대담하게 대답했다.
“첫사랑을 되찾기 위해 돌아왔어요.”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이 땅에 떨어지며 하채원의 마음도 덩달아 덜컥 내려앉았다.
밖에 비가 또 많이 오는 것 같았다.
하채원은 당황해서 TV를 끄고 건드리지 않은 아침상을 거두었다.
주방에 들어선 그녀는 육태준이 핸드폰을 깜박하고 두고 간 것을 발견했다.
핸드폰을 손에 든 그녀는 마침 화면에 아직 읽지 않은 문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태준 오빠,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기분 나빴죠? 오빠가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오늘 밤 우리 한번 만나요. 너무 보고 싶어요.]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하채원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택시를 타고 육태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 하채원은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육태준은 하채원이 그의 회사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를 찾을 때마다 항상 뒷문으로 들어가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육태준의 개인비서 허우진은 하채원이 오는 것을 보고도 덤덤하게 인사했다.
“하채원 씨.”
육태준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육태준의 아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존재로만 생각했다.
육태준은 하채원이 전해주는 휴대폰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점심 식사, 서류, 옷, 우산 등 자신이 잊어버린 것은 무엇이든 가져다줬다...
“특별히 나에게 물건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하채원은 멍해졌다.
“미안해요. 깜박했어요.”
‘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진 걸까?’
배다은이 보낸 문자를 보고 육태준이 갑자기 사라질까 봐 잠시 두려웠던 것 같았다.
떠날 때 하채원은 육태준을 돌아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
“태준 씨, 아직도 배다은을 좋아해요?”
육태준은 요즘 하채원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깜빡깜빡할 뿐 아니라 이상한 소리도 많이 하는데, 그런 그녀가 어떻게 육씨 가문 사모님이 될 자격이 있겠는가?
육태준은 귀찮은 듯 대답했다.
“심심하면 가서 일이나 좀 해.”
하채원도 예전에 일자리를 찾았지만 육태준의 어머니인 고설희가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태준이가 청각 장애가 있는 아내를 얻었다는 걸 만천하에 알릴 예정이야?”
그래서 결국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가사에만 전념하여 유명무실한 육씨 가문 사모님이 되었다.
집에 돌아온 하채원은 밤까지 혼자 앉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 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는데 힐끗 보니 낯선 번호였다.
전화를 받으니 하채원을 겁에 질리게 하는 달콤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배다은의 목소리였다.
“채원 씨? 태준 오빠가 술에 취했는데 데리러 올 수 있어요?”
프레스 클럽.
하채원이 룸에 도착했을 때 부잣집 도령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은 씨, 이번에 돌아온 건 태준이를 되찾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지금 딱 좋아요. 빨리 태준이한테 고백해요.”
배다은은 예쁘고 성격이 좋았는데 육태준의 첫사랑이라 상류사회의 부잣집 도련님들이 모두 두 사람을 맺어주고 싶어 했다.
배다은은 우물쭈물하지 않고 육태준을 향해 말했다.
“태준 오빠, 난 오빠가 좋은데 우리 다시 시작해요.”
룸 앞에 도착한 하채원은 마침 이 말을 들었다.
룸 안의 사람들이 육태준을 설득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그의 친구인 김도영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태준아, 다은이를 3년이나 기다렸는데 드디어 돌아왔잖아. 빨리 말 좀 해봐.”
하채원은 문 앞에 굳어 있었다. 심장 박동이 우레와 같이 크게 들려올 때 마침 한 남자가 룸 문을 열었다.
“하채원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