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물론이지.”
임서우는 설계도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때도 언니가 격려해줘서 용기 내어 매니저님께 드렸었어.”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이번에도 마침 언니 의견 들으려던 참인데.”
임예지는 설계도를 펼쳐보더니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지만 곧이어 질투가 들끓었다.
임서우의 디자인은 매번 과감하고 창의적이며 사람을 감탄케 한다.
이 천한 년은 어릴 때부터 그림 천재였고 한은실이 아무리 타격을 줘도 끝까지 그림 그리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임예지는 그런 그녀가 죽을 만큼 미웠다. 그녀도 원래 타고난 그림 실력을 지녔고 매우 노력하고 있지만 천재의 일격에 견딜 수가 없었다.
“어때? 뭐가 부족해 보여?”
임서우가 겸손하게 물었다.
이제 곧 빈 몸으로 나 앉을 팔자라 이 직업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너무 잘 그렸어. 지금 네가 이렇게 그리는 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일이야.”
임예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천재면 또 뭐?’
‘결국 넌 내 손에 놀아나는 도구일 뿐이야!’
회사에 도착한 후 그녀는 친히 임서우를 이연아의 사무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연아가 보는 앞에서 임예지는 임서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걱정 마. 원고 문제없을 거야.”
그리고 이연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이 매니저님.”
이연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임예지를 배웅했다.
곧이어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임예지는 임서우와 함께 들어왔고 디자인 원고까지 언급했으니 이는 엄연한 암시였다.
‘이번 원고도 또 임 팀장의 걸작이겠지.’
이연아는 대충 훑어보았는데 역시 임예지의 실력에 걸맞았다.
그녀는 코웃음 치며 싸늘한 눈길로 임서우를 쳐다봤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세요 매니저님?”
임서우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럴 리가요.”
이연아는 원고를 책상에 내던졌다.
“임 팀장님도 만족해하시는 작품인데 제가 마음에 안 들 리가 있겠어요?”
“...”
임서우는 살짝 의아했다. 이연아는 지금 그녀가 자신을 건너뛰고 먼저 임예지에게 원고를 보여줬다고 질책하는 걸까?
그녀는 속절없이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매니저님. 다음엔 완성하자마자 먼저 매니저님께 보여드릴게요.”
‘다음이라니?’
‘얘가 지금 날 바보로 아나?’
그녀는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손을 흔들며 임서우더러 얼른 나가보라고 했다.
이연아는 당분간 임서우에게 새 오더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제자리로 돌아온 임서우는 아침에 사인을 마친 이혼합의서가 생각나 강하성에게 카톡을 보냈다.
[이혼합의서 내용 문제없어요. 우리 언제 수속하러 갈까요?]
강하성은 카톡을 보더니 왠지 모를 울화가 치밀었다.
어제 함께 자놓고 지금 또 이혼하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재산은 일 전 한 푼 없다는 데도 동의한 걸 보면 가정법원으로 가는 길에 몰래 그의 등에 칼이라도 꽂을 속셈이겠지.
강하성은 음침한 표정으로 타자했다.
[맞선남이 꽤 마음에 들었나 봐?]
미처 전송하기도 전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임예지가 어느새 사무실 앞에 와 있었다.
강하성은 휴대폰을 거둬들였다.
“하성아, 어젯밤엔...”
“누가 내 잔에 약을 탔어.”
“이해해. 다만 나도 귀국한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집에서도 슬슬 다그치셔.”
“회사에 요즘 몇 개의 큰 프로젝트가 있어서 시간을 빼낼 수가 없어. 결혼 준비는 네가 알아서 하면 돼.”
“하성아.”
임예지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정법원에 다녀오는 거 20분도 채 안 걸려. 너 설마 서우랑 이혼하기 싫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강하성은 곧바로 부인했다.
“아니길 바랄게. 사람 감정이라는 건 먼저 마음이 흔들린 자가 지는 거야. 나는 달갑게 너한테 져주겠지만 너도 나처럼 비굴해지는 건 싫어...”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성아,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돼.”
“알았어. 괜한 생각 하지 마. 최대한 시간 내서 이혼하러 갈게.”
강하성은 저도 몰래 짜증이 밀려왔다.
임예지가 나간 후 그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방금 작성한 카톡을 삭제해버렸다.
임서우의 맞선남이 어떤지는 그와 연관이 없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다시 카톡을 작성해서 보냈다.
[시간 나는 대로 말해줄 테니까 그때 가서 번복하지나 마.]
임서우는 그 문자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의 말투 속에 절박함이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듯싶다.
이어진 며칠 동안 강하성의 연락은 없었고 오히려 그녀에게 새로운 오더가 차려졌다.
게다가 반드시 그녀가 책임져야 한다고 지목까지 당했다.
임서우는 드디어 누군가의 인정을 받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하지만 이연아는 몹시 걱정됐다. 임예지가 오늘 마침 출장 갔는데 적어도 사흘에서 닷새가 걸려야 돌아온다.
고객을 보낸 후 그녀는 임서우를 사무실로 불렀다.
“임 팀장님이 출장 간 건 알죠?”
“네.”
임서우는 이 질문이 뜬금없고 의아할 따름이었다.
“고객이 준 시간은 단 사흘이에요.”
이연아는 빙빙 돌려 말하며 임서우가 스스로 포기하길 바랐다.
“사흘 동안 바짝 야근하면 완성할 수 있어요.”
임서우는 이런 기회를 포기할 리가 없다.
이연아는 몹시 화났다. 임서우의 밝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더 한심할 따름이었다.
남의 것을 표절한 작품이 인정을 받는 게 그토록 기뻐할 일일까?
“알았어요.”
그녀는 임서우가 반드시 큰코다쳐봐야 얌전해질 거라고 믿었다.
“시간은 단 3일이에요. 이번에 새로운 고객이라 엄청 중요해요.”
“네, 알아요. 걱정 마세요 매니저님. 반드시 최선을 다할 겁니다.”
자리로 돌아간 후 임서우는 또다시 새로운 테스트에 몰입했다.
새로운 고객이라 정보가 부족하고 기한이 3일이라 고객의 마음에 드는 설계도를 내놓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오더를 따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매일 서너 시간 밖에 안 잤다.
사흘 뒤 원고를 본 이연아는 화들짝 놀랐다.
“직접 그린 거예요?”
그녀는 저도 몰래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번 원고는 전에 것들보다 더 성숙해지고 노련미가 차 넘쳤다.
임서우는 다크써클이 잔뜩 내려온 채 머리를 끄덕였다.
“어떠세요 매니저님?”
이연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임서우가 정말 갈피가 안 잡혔다.
이번 작품은 절대 임예지가 도와줄 리 없다.
그렇다면 임서우가 정말 천재 디자이너란 말인가?
그녀는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될지 말지는 제가 아니라 고객이 결정해요.”
이어서 문 앞으로 걸어가더니 다시 머리를 돌렸다.
“거기 서서 뭐 해요? 함께 고객 만나러 가야죠. 그분은 서우 씨만 믿고 찾아왔어요.”
“네.”
임서우는 너무 기뻤다.
‘요 며칠 고생한 보람이 있네 그래도.’
귀빈실에서 고객 장하영 여사가 앞에 놓인 과일과 디저트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지난번에도 이랬는데 이 고객이 조금 특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연아는 그녀를 벼락부자로 분류했다.
사실 벼락부자든, 명문가든 디자인 비용만 낼 수 있다면 전부 환영이다.
“오래 기다리셨죠 하영 씨.”
이연아가 활짝 웃으며 견본 원고를 건넸다.
“원하시던 드레스 디자인을 마쳤어요. 저희 임서우 디자이너가 사흘 밤을 꼬박 새웠거든요.”
장하영은 견본 원고를 대충 펼쳐보더니 임서우에게 물었다.
“이게 고작 사흘 동안 밤새워서 만든 거예요?”
임서우는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빛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요? 마음에 안 드시는 점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다시 수정...”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하영이 견본 원고를 냅다 얼굴에 내던졌다.
임서우는 다짜고짜 공격을 당하고 뺨이 종이에 베여 너무 아픈 나머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스읍...”